김하늬의 풀잎에 드는 햇살

배꽃이 난분분지는 봄날 오후, 모처럼 차를 마시며 가까운 지인 부부 세 팀이 담소를 나눴다. 빼도박도 못하는 해사한 봄날에 걸맞게 사랑이 그날의 주된 화제였다. 20대 활기왕성한 아들을 둔 친구는 아들의 연애를 지켜보며 어떻게 하면 아들 맘을 돌려놓을 수 있겠냐고 하소연이었다. 최근 아들이 여자친구에게 푹 빠져 있는데 사람 됨됨이는 바르나 외국인이어서 며느리감으론 탐탁치 않다는 것이다. 정서나 문화, 언어가 같은 한국 아이를 며느리로 삼고 싶은 친구의 맘을 십분 이해했지만 내 충고는 단호했다. 의외로 해결책은 늘 간단하다. 나의 그때 그 시절로 되돌아 가서 내 맘으로 상대방을 읽어주면 답이 나오는 것이다. 말린다고 될 일이더냐고요! 사랑이란 그 놈이! 넌 어땠습니까? 나의 명료한 답에 친구는 빵터지며 이내 자신의 연애 시절을 회상했다. 사내 연애를 해서 결혼에 골인한 부부의 얘기를 듣자하니 참으로 풋풋하고 애틋한 아날로그식으로 우린 서로 사랑하고 그 힘으로 불안한 청춘의 강을 용케도 잘 건너왔구나 싶어졌다.
날마다 회사에서 마주치던 한 남자에 대해 한 여자는 그의 감정에 대해 어느 날 문득 알고 싶어졌다. 늘 친절하고 자상한 남자가 자기에게 어떤 각별한 감정을 갖고 있지는 않을까 설레었지만 남자의 미소는 늘 애매했기 때문에 여자는 평소의 야무진 성품대로 단도직입적으로 묻자고 작정했다. 친구 남편은 여기까지 아내말을 듣더니 저으기 만족한 승리자의 웃음을 띄며 그 날을 대변했다. 어느 날 여자가 스치듯 다가오더니 남자 주머니에 뭔가를 쑥 넣고 가더란다. 엉겹결에 주머니의 것을 꺼내보니 뜻밖에 거기엔 다소 저돌적이면서도 어딘가 수줍은 듯한 여자의 맘이 담긴 쪽지 글이 들어 있었다. “내가 맘에 든다면 나와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여주세요” 남자는 황당해서 싹 무시하려 했지만 그랬을 때 여자가 받을 상처가 걱정이 되었다고 한다. 그게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랴. 남자는 순전히 자신이 꾀인거라고 하지만 늘 사랑은 연민에서 출발하는 법. 한편으론 여자의 당돌한 게 매력적이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무시할 수 없었다란 말을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생략하고 있음이 연애의 고수인 내 눈에는 다 읽혀졌다. 여자의 말대로 차마 눈맞추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쑥스럽기도 하고 또 자신이 꼭 여자를 맘에 두고 있다고 백프로 인정하는 셈이어서 이도저도 아닌 적당한 중간자 입장에서 적당히 눈 맞추고 씩 웃어 줬다는 것이다. 누이좋고 매부좋고 도랑치고 가재 잡고 마당쓸고 돈줍고 꿩먹고 알먹고……남자의 백프로 승리가 보장된 고도의 심리전이지 않은가!
당찬 여자가 남자의 관심없는 맘을 알고 확 돌아서기라도 하는 날엔 뭔가 서운할 터이고 그렇다고 덥썩 나도 당신을 맘에 두고 있었소 하긴엔 좀 더 재보고 싶은 꼼수를 두고 싶고, 일테면 말이다. 남자는 아니라고 하지만 정말 아니라면 그 여자가 상처를 받든 말든 개의치 않아야 한다. 그래야 그들의 관계가 더이상 발전적이질 않고 일단락 지어지는 것 아니겠는가.
아무튼 각설하고 그 날의 쪽지 한 장으로 그들은 오늘 부부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우리와 담소를 나누는 주인공이 되었고 또 한 부부 역시 편지가 다리를 놔준 전형적인 아날로그식 사랑팀이었다. 그들의 전설 또한 만만찮은 사연을 담고 있는데 이 앞에 말한 부부의 사랑 전개가 봄날 흐르는 잔잔한 개울물 같다면 이들의 사랑은 한 여름 소나기처럼 시원하고 격정적인 것이었다. 짧은 지면상 다 전하지 못하는 게 참으로 애석한 일이지만 훗날을 기약하며 아쉬운 대로 간략히 전해본다. 첫 만남 때 남자는 여자에게 “당신은 내 아내가 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린 죽음밖에 없다!”라는 다소 격한 러브레터를 전해 줬다고 한다. 그래도 천사같은 이 여자, 천사처럼 미소만 짓고 꿈쩍 않았다지! 그러자 사내중의 사내 이 남자는 50명이 단체로 하얀 간호사 가운을 입고 실습 가는 길의 버스를 탁 가로 막고서 달리는 버스를 세우는 용맹함을 떨쳤다. 버스에 올라서니 100개의 눈동자가 일시에 자신에게 집중 포화 되는데 낯뜨거움도 잠시 똑같은 옷을 입은 여자들 중에서도 그 남잔 그 여잘 쉽게 찾아내는 괴력을 떨쳤다. 하, 이것이 사랑의 힘이 아니고 무엇이랴! 뭐, 달리 신공이 있었다는 게 아니라 유독 딱 한 사람, 그 남잘 똑바로 보지 못하는 여자가 있었으니 찾는 거야 식은 죽 먹기 였을 터! 하하. 어쨌든 그 날을 기점으로 남자는 결혼하는 그 날까지 매일 단 하루도 거르는 법없이 편지 공세를 펼쳤단다. 그런 그 남자에 감동하지 않았다면 그 여자, 아내라는 이름으로 지금 그 남자 옆에 자리하고 있지 않겠지.
나 역시도 지금의 남편에게서 라면 한 박스 분량의 연애편지와 대학노트 한 권 분량의 헌정 시를 받고서 마음이 흔들려 버렸다. 요즘은 디지탈 시대라 좀처럼 손 편지 주고받을 일이 없어 그 시절의 연인들처럼 애틋하고 애절한 감성을 나누기는 좀처럼 쉽지 않은 거 같다.
사랑한다면 그들처럼! 오늘 손글씨로 연애편지를 써보시라! 떨리는 마음으로 적어 내려가는 당신의 손글씨는 영혼을 만져주는 스킨십이 될 것이다. “흔들리지 않고서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당신의 연인은 편지를 받는 순간 당신을 향한 꽃잎을 수줍게 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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