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강 순 수필가

어릴 적 나의 봄은 우리 집 토담으로 쏟아지는 따스한 햇살로 시작됐다. 햇살 아래 한가로운 낮잠을 즐기는 고양이의 몸짓이 시작되면 들녘은 벌써 군데군데 연푸른 기운이 일렁거렸다. 그 즈음 우리 집 마당가에는 어김없이 매화꽃이 폈다. 매화향기에 취할 사이도 없이 매서운 꽃샘바람 한줌이 지나가면 몸살처럼 꽃잎은 떨어지고, 들녘은 어느 새 봄비 한 모금에 일제히 환호하며 일어서는 군중의 무리인 양 초록의 물결로 술렁거렸다.
넓은 들판을 물들인 바람은 서당골 쇠재골을 지나 강가를 휘돌아 산으로 올랐다. 그러면 강가 줄지은 수양버들에 연두빛 물이 오르고 노란 개나리가 마을길을 환히 밝히는가 싶으면 정백산은 진달래로 붉어지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린 학교에서 돌아오면 하루는 들길로 하루는 산으로 그렇게 들과 산을 뛰어다니며 긴긴 봄날을 보냈다. 눈에 보일 듯 말 듯한 작고 앙증맞은 하얗고 노란 풀꽃들 사이로 걷다보면 다랑이 논둑길은 끝이 없이 꼬불꼬불 이어졌다. 마치 동화책 삽화에나 나옴직한 들길을 그렇게 우린 줄을 지어 걷기를 즐겨했다. 온 산을 헤매며 붉게 물든 산 능선을 뛰어넘어 손아귀 가득 진달래를 꺾어 돌아오던 길엔 내 발걸음에도 내 가슴에도 온통 진달래 분홍 꽃으로 물들어 있었다.
3월이 되면 아버지는 한해를 시작하는 영농준비에 바쁘셨다. 겨우 내내 꼬아놓은 새끼며 가마니정리, 가지치기, 거름내기 등등 분주하게 봄을 준비하셨다. 아버진 마당가운데 펼쳐진 일거리에 부지런히 손놀림을 하시면서도 내게 쉼 없이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 때 들었던 아버지의 옛날이야기는 아직도 나의 마음에 자리해 나의 감성을 자극한다.
아버지의 이야기가 시작되면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숨죽여 이야기를 들었다. 청진의 추위는 여간 무서웠던 게 아니어서 숨을 쉴 때마다 입김이 새어나오면 그대로 얼음이 되었다고 했다. 행여 입을 벌리기라도 하면 벌린 입이 그대로 얼어 입을 쩍 벌리고 바보처럼 다녀야 했다면서 비틀어진 입 모양을 흉내 내며 나를 자지러지게 웃게 했다. 또한 그곳 바람은, 다리에 힘을 주지 않으면 그대로 사람을 삼켜버렸다고 했다. 그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바람에 날아가 대동강물에 빠져 죽는 것도 수없이 보았다고 했다. 아버지도 하마터면 바람에 날아가 강물에 빠져 죽을 뻔했는데 제발 우리 막둥이 얼굴 한 번만 보고 죽게 해 달라고 애원했더니 바람이 살며시 놓아주었다면서 눈을 말똥거리며 바라보는 나를 가슴 졸이게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늦둥이인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다녔던 여행지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나고 실감나게 꾸며서 들려주신 것이다.
그러시고는 끝내 잊지 않으시고 한마디 하셨다. 그 추운 청진 땅에도 봄이 오더라고. 어린 나를 앉혀두고 하신 그곳의 봄소식이 얼마나 큰 감동이었을지 나는 이제야 깨닫는다. 무서우리만큼 추운 청진 땅, 영원히 봄은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았던 그곳에서의 새싹은 아버지를 그토록 감격시켰으리라.
나는 오늘 한강 둔치에서 서울의 봄을 맞는다. 남편과 아이들은 롤러브레이드를 타고, 나는 카메라를 들고 아이들의 행복한 모습을 열심히 찍으며 강가를 두리번거렸다. 수양버들에 물이 오르고, 강가에는 푸른 잎들이 기적처럼 땅을 뚫고 솟아오르고 있었다. 토끼풀, 봄까치꽃, 민들레, 냉이꽃 등등 이름 모를 초지들이 잿빛풀숲을 헤치고 푸른 바람을 몰고 오고 있었다. 내 어린 날의 봄날처럼 서울의 봄도 그렇게 요술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지금은 갈 수도 없는, 생경한 청진이야기로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아버지의 이야기처럼, 내 아이들에게 나도 내 어린 날의 봄날 이야기로 잃어버린 봄을 찾아줘야겠다는 다급한 마음이 인다.
학교와 학원으로, 아님 사각모니터 앞에 붙들려 봄을 잃어버린 아이들에게 내 유년의 추억을 어떻게 남겨줘야 할까. 문득문득 내 기억의 실마리 속에 살아오는 추억을 더듬으며 부모님을 생각하고 살며시 미소짓는 것처럼, 잊지 못할 어린 날의 기억 하나쯤은 남겨줘야 할 텐데 ….
올해도 봄꽃은 열병처럼 필 것이다. 내 동심을 물들였던 매화 살구 복사꽃 조팝꽃 들찔레꽃 들은 만날 수 없다 해도 도시를 물들이는 개나리 진달래 목련화 철쭉 라일락 등꽃들이 연이어 피어날 이 봄날의 환희를 꼭 짚어가며 내 아이들과 함께 감상해 봐야겠다. 내 어릴 적 봄날의 기억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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