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늬의 풀잎에 드는 햇살

또 하나 소중한 인연의 매듭이 풀려 버렸다. 성실하고, 진실했던 그의 자취는 아직도 가슴에 남아 여울지는데 이제 그는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갑작스런 미국인 내 친구 헤롤드의 부고! 그를 잃은 것은 내게 몹시 큰 충격과 아픔을 주었다.

몇 해 전 여름, 토네이도가 몰려왔을 때의 일이다. 모두를 공포에 떨게 했던 허리케인의 위력으로 도시는 한 바탕 전쟁을 치른듯 텅 비어 버렸다. 가게의 생필품은 진작에 동이 났고, 피난을 가느라 사람들은 아우성을 치며 빠져 나갔다.

건물들의 문이란 문은 견고한 합판으로 굳게 둘러쳐졌고, 사람들은 최소한의 피해라도 막아보려고 이사가는 사람들처럼 온 살림을 꾸려서 깨지거나 젖지 않게 이미 대책을 세운 후였다. 우린 처음 닥친 일이라 경황이 없어 직장에서 늦게서야 돌아와 아무런 준비도 못한 채 망연자실 손을 놓고 있었다. 방송에서는 연신 대피하라는 경계경보가 울리고 마음은 아득하기만 했다. 그런데 피난을 가려고 나서던 이웃 헤롤드가 우리 사정 얘길 듣더니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 자리서 팔을 걷어 부쳤다.

커다란 집을 낭창낭창한 합판으로 마치 건물째 포장이사하듯 통째로 에워 쌌으니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실로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린 꼼짝없이 앉아서 태풍을 맞을 수 밖에 없었는데…… 남편은 더워진 가슴으로 그를 끌어안고 감사함을 대신했다. 우린 오랜 지기처럼 성큼 가까워져 어깨를 맞대고 아직은 살만한 세상을 함께 나누던 참이었다. 그런 우리의 친구 그가 떠났다. 무르익은 우리 우정에게 작별 인사도 없이.

오늘은 그의 장례식 날이다. 어떻게 예를 갖출 줄 몰라 지인들에게 조언을 구하니 미국 풍습은 부조금 대신 음식을 한 가지씩 해가는 거라고 한다. 해서 손님들이 충분히 먹고 남을 만큼 넉넉히 불고기를 준비하고 음료수도 잔뜩 싣고 갔다.

떠나간 그가 비종교인이어선지 장례식은 독특하게 진행됐다. 먼저 그의 아들이 단상에 올라서 아버지를 추억하며 그가 좋아하던 것들과 그가 남긴 재산내역과 그의 마지막 말이 무엇이었는지 담담하게 얘기를 마치고 계속 식을 주도했다. 그리고 돌아간 이를 주제로 논문발표라도 하듯 그를 사랑했던 가족들, 친구들, 이웃들이 돌아가면서 한 사람씩 나와 그를 추모했다. 생전의 그와 얽힌 에피소드, 아픔, 기쁨, 회한, 사랑등을 가만가만 고백하는 것이다. 간간히 여기저기서 흐느끼기도 했지만 누군가 그와 재밌었던 일을 얘기할 때면 망설이지 않고 모두들 유쾌하게 웃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그의 친구들이 나와서 삼중주를 하며 그가 좋아하던 컨추리 송을 부르기도 했는데 한결같이 밝고 빠른 곡들이었다. 어떤 이들은 음악에 맞춰 발박자를 치고 어깨춤을 추기도 했다. 난 도무지 명랑하기 그지없는 이 장례식이 생경스러워 혹시 어떤 파티에 잘못 찾아온 것은 아닌가 싶어 옆사람에게 고인의 이름이 해롤드 맞냐고 몇 번이고 물어보곤 했다. 한 시간 반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 후, 장례식은 조촐한 파티처럼 알맞게 소박하고, 간결하고, 명쾌하게 끝났다. 뒷풀이로 자리를 옮긴 식당에서 난 또 한 번의 충격을 받았다. 모두들 집에서 쓰는 보통 크기의 접시에 어떤 이는 쿠키, 어떤 이는 과일, 어떤 이는 햄이나 터어키 따위를 조금조금씩 가져와서 식탁에 내려놓았다.

유일하게 산더미처럼 음식을 싣고가 낯 뜨거워진 나는 주저리 변명을 늘어 놓았다.
“자, 여러분, 이것은 한국의 대표음식이랄 수 있는 불고기 입니다. 한국에선 초상이 나면 지나가는 개 까지도 먹고 남을 수 있게 이렇게 음식을 푸짐하게 한답니다. 그래서 손님들은 밤새도록 먹고, 마시고, 재미삼아 가벼운 도박도 하면서 날을 새지요. 얼핏보면 허례허식 같지만 그 속엔 바로 한국인의 특성인 정이 깃들어 있답니다. 고인과 가족들이 슬픔에 젖어 무작정 외롭지만은 않게 그들 곁을 지키며 한껏 위로의 분위기로 만들어 주는 것이지요.” 그들은 나의 돼먹지 않은 웅변에 공감한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는 갑자기 부끄러워지려고 하던 유서깊은 우리 문화에 대한 나의 속깊은 사과였으며 한편으론 체면을 중시하는 우리 문화에 대한 최소한의 변명같은 것이기도 했다. 각나라 고유문화의 다양성을 두고 우열을 가린다는 것은 지극히 오만하고 어리석은 짓이겠지만, 세계를 지구촌 하나로 가정하고 어떤 장례문화를 하나 선택해야 한다면 이들의 장례문화를 모범답안으로 채택했으면 하는 개인적인 소망이 바람처럼 일어났다.

조용조용 고인을 추억하고 대화를 통해 모두 아픔과 슬픔을 공유하지만 명랑하던 그 자리, 죽음도 마치 삶의 연장선상에 놓인 것처럼 초연해 보이기까지 하던 그들…… 마치 고인이 안녕하고 먼 여행이라도 떠난 것처럼 심상하던 그들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친구 헤롤드도 안심하고 먼 여행길에 나섰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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