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늬의 풀잎에 드는 햇살

음식을 한참 조리중인데 갑자기 정전이 되었다. 내 짜증이 터지기도 전에 아이는 과제물인 에세이를 쓰다말고 머리를 쥐어 뜯었고 남편은 컴퓨터로 서류작업을 하다 씩씩거렸다. 전기만 나갔을 뿐인데 모두 동작 멈춤,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음! 물리적인 전기만 나가도 이러할진대 마음의 정전 상태라면 어떨까? 촛불을 찾아 켜들고 보니 예정처럼 어떤 일이 어둠을 헤집고 떠오른다.

대학 새내기 때 생뚱맞게 동양화를 배워 보겠다고 학원에 등록했었다. 나라라도 구할 태세로 야무지게 덤볐으나 그림이라는 게 의욕만으로 되는 게 아니어서 늘 먹물로 동그라미만 그리다 끝이났다. 그 어느 날도 동그라미만 무한반복 시키시는 선생님이 야속해서 궁시렁대다 수업이 끝났다. 허탈한 마음으로 가방을 메고 막 일어서는데 갑자기 정전이 됐다. 갑작스런 사태에 모두들 우왕좌왕하고 나도 간신히 벽을 더듬어 출구를 찾는데 문득 어떤 손이 내 손등에 겹쳐졌다. 서로 출구를 찾으려다 한 실수겠거니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기엔 그 손길이 너무 뜨거웠다. 온 몸이라도 데울 듯한 그 손의 메시지를 직감적으로 읽고 어둠 속에서도 얼굴이 붉어졌다. 느닷없는 스킨십에 기분이 나빠야 하는데 내 의지와 상관없이 가슴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공연히 죄라도 지은 것처럼 당황해서 황급히 밖으로 나왔다.

누굴까? 그 와중에도 의도적인 그 손길의 주인공이 궁금해졌다. 한 두 세 명이 리스트에 올랐다. 늘 깐죽깐죽 내 화선지에 낙관이랍시고 지 이름을 써넣어 내 화를 돋우던 남학생, 고 맹랑한 L일까? 아님 야외수업 시간에 물을 길어다 주고 간식거리를 챙겨주던 자상한 P일까, 아님, 늘 자리를 잡아 놓고 생색을 내는 Y일까… 나의 맥락없는 탐색전이 제 풀에 꺾일 무렵 그 주인공이 정체를 드러냈다. 아, 그 아인 뜻밖에 화보에서 막 걸어나온 듯 모델같은 용모로 여학생들 사이에서 선망의 대상이었던 K였다. 버스 정류장에서 같은 시간에 매일 만나다시피하는 그 아이. 내게 말 한 번 거는 법없이 아니, 눈 길 한 번 주는 법없이 늘 도도하고 거만하기 짝이 없어 공연히 부담스럽던 그 아이. 그런 아이가 말없이 내게 쪽지를 전해주는 것이었다. 그 때 가늘게 떨리던 그의 손! 난 어렵지 않게 정전 속의 그 손길을 떠올릴 수 있었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누르고 약속 장소로 나갔다. 그런데 이 아인 도대체가 통 말이 없었다. 어쩌라고! 나도 수줍고 어색하고 서툴긴 마찬가진데 남자애가 더 어쩔줄 몰라하니 자연 그 자리가 불편해졌다. 처음이어서 그랬겠거니 하고 두 세번 더 만나봤으나 여전히 말이 없었다. 지나치게 소심한 탓인지 어쩌다 한 두마디 할라치면 말을 심하게 더듬기까지 했다. 아무리 모델같은 용모라지만 도무지 매력이 없었다. 내가 어색함을 모면해 보려고 읽었던 책이야기, 좋아하는 음악 얘기등으로 간신히 화제를 이끌었지만 이내 시들해졌다. 공감대가 없다는 거, 피차 둘 다에게 정전의 시간이었다. 그 꽃같은 시절을 침묵으로 견디기엔 내 청춘의 화사함이 허락지 않았다. 내가 먼저 절교를 선언하고 학원을 그만둠으로써 그 아이와의 짧은 사연이 일단락 되었고 난 이내 그 아일 잊어 버렸다.

그런데 1년 쯤 지났을까? 그 아이 형이라는 사람이 날 찾아 왔다. 그 형이 전해준 봉투 속에는 붓으로 날 그린 그림과 함께 짧은 편지가 들어 있었다.
“처음으로 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너, 처음으로 내 말을 귀기울여 준 너, 참 고마웠어. 네 덕분에 힘든 시간들을 견뎠었다”

뜻밖의 방문과 뜻밖의 선물에 내가 당황해 하자 형이라는 사람이 눈가를 붉히며 전해준 말은 K가 이제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거였다. 말더듬는 버릇때문에 그 아인 사람들 만나는 걸 극도로 꺼려해서 학교를 자퇴하고 늘 집안에만 처박혀 있었단다. 그나마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서 치료의 일환으로 학원엘 다니게 되었다고… 그러면서 차츰 밝아지는 거 같아서 가족들은 한시름 놓았는데 다시 증세가 도지는가 싶더니 어느 날 세상을 등져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럴 수가! 그 얘길 들은 난 너무 큰 충격으로 한 동안 자책감에 시달렸다. 내가 따뜻하게 끝까지 그 아이의 친구가 돼 주었다면 그 아인 암흑의 시간을 벗어날 수 있었을까. 어둠 속에 웅크려 있던 그 아이, 그 마음의 정전에 한 줄기 빛이 돼 줄 수 있었을까.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우울하기만 했던 그 아이와 가여웠던 내 청춘의 한 자락이 아직도 정전만 되면 떠오르는 건 그만큼 힘들게 빛으로 걸어 나왔던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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