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동안 와 있던 아이가 집을 떠났다. 아이가 홀로 간다는 것, 에미 곁을 떠난다는 것의 쓸쓸함이 며칠 전부터 세포 사이사이 머슬거리더니 어젯밤은 기어코 불면으로 이끌었다. 밤새 이것저것 아이의 자취방에 들려 보낼 보따리들을 주렁주렁 꾸리고서도 잠을 이룰 수없어 책을 뽑아 들었지만 책도 마음을 붙들어 주진 못했다.

날 새는 기척들이 반가워 뜰에 내려서니 서리가 하얗게 내려 온통 뜨락을 뒤덮었다. 홀로 종종 거리고 먹이를 찾는 작은 새의 빨간 발목이 애처롭도록 시려 보인다. 문득 저 녀석도 에미 곁을 떠나 살아내려 애쓰는구나 군걱정을 떠안는다.

저 된서리 속에 먹이가 있을 턱이 만무해 쌀을 한 줌 들고 나오니 그 새 어디론가 날아가고 없다. 공연히 콧날이 시큰해져 돌아서려니 언제 깼는지 아이가 뒤에서 가만 껴안는다. 등 뒤로 전해오는 아이의 체온이
마음을 흔든다.

핏줄이란 무엇이던가! 따뜻하고 뭉클한 이것, 미세한 가슴 떨림. 말없는 교류가 서로에게 스미어 자연 손을 맞잡고 산책을 나섰다.

굳이 하고 싶은 말, 해주고 싶은 말을 하지 않아도 묵묵히 걷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아침의 맑은 기운이 백 마디 말보다 아이에게 필요한 덕목이고 가르침이다.

공원에 도착하니 그제서야 아이에게 지키지 못한 약속이 떠오른다. 방학해서 내려온 첫 날부터 축구공을
사달라는 그 소박한 바람을 건망증 심한 에미는 매일 매일 까먹고, 산책나온 아침이면 다시 기억해는 일을 반복하다

벌써 방학 끄트머리에 섰다. 방학동안 돈 안들이는 운동으로 체력을 다지겠다는 다부진 포부였는데…가족들과 운동으로 애정을 돈독히 하자는 제법 거창한 의미도 있었는데!

헛헛한 웃음으로 미안하다고 하니 아인“ 헤헤 울엄마 최연소 양로원 입학생되는 거 아니냐”며 너스레로 에미의 미안함을 덜어준다.

집에 돌아오니 남편도 잠을 설쳤는지 푸석푸석한 얼굴로 작은 화분에 푸른 식물을 옮겨 심고 있다. 불꺼진 자취방에 홀로 들어서면 그 순간 그렇게 쓸쓸할 수가 없어서 혼잣말을 한다는 아이. 그 말이 목에 걸려 뭐라도 맘 붙여보라고 애비의 짠한 맘을 심고 있는 것이다.

무심하기 그지없는 작은 녀석도 이별의 시간이 임박 해오자 말없이 지 누나의 주변을 서성거리며 툭툭 누나의 짐보따리를 건드려본다.

공부하느라 도서관에 처박혀 얼굴 볼 새없이 바쁜 조카아이까지 아이가 떠나는 날이라고 오늘은 도서관을 접고 집에서 배웅하려 대기중이다.

여전히 책에 코를 박고 있지만 그게 어딘가. 그 아이의 마음 씀, 그것으로 된 것이다. 잘 가란 말을 오만 오천 번도 더 하고 잘 있으란 말을 오만 육천 번쯤 한 후에야 기나긴 이별식이 끝나고 푸른 식물을 안고 아이가 떠났다.

아이가 가고 난 후의 집은 모든 게 그대로인데도 텅 비어 보인다. 공연히 이방저방 기웃거리다보니 곳곳에 아이가 써놓은 포스트잍이 들어 있다. 씽크서랍을 여니 하트를 날리며 웃는 스누피가 그려져 있다.

아이의 별명은 스누피! 엄마! 울거지? 울지말라고 하트(하트모양의 초콜렛) 남기고 가요.~세면대 서랍 속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않고 레몬모양의 화장품에 포스트잍이 붙어있다.

엄마! 이거 발뒷꿈치 튼살 부드럽게 해준다네요. 애가, 글쎄 나보다 낫네요. ㅎㅎ

뜻하지 않은 핸드백 속에서까지 아이의 익살이 웃고 있다.

엄마! 내가 예쁘게 만든 엄마 이름표야. 울 엄마 집 잃어 버리면 누구든 찾아주라구 주소도 또박또박 적어 놨다우. 이만하면 괜찮은 딸이죠? 헤헤.

울적해질 에미의 맘을 미리 짐작하고 어떻게든 웃게 하려고한 아이의 성심이 갸륵해 결국 빙그레 웃고 만다.

어쩌면 내일은 신발장에서, 모레는 서재에서 아니 매일매일 난, 아이가 주는 행복의 메시지가 담긴 포스트잍을 생활의 갈피갈피에서 찾게 될 것이다.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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