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늬의 풀잎에 드는 햇살

▲ 김하늬 미주 한인 신문 기자. 칼럼니스트
살다보니 뜻하지 않게 남의 일에 해결사 노릇을 할 때가 종종 있다. 지극히 유약하고 겁많고 개인주의적인 성품상 남의 일에 밤 놔라, 대추 놔라 할 깜냥이 도저히 아닌데도 그랬다. 남이 내 생활에 끼여 드는 것이 싫어서 나 역시도 철저히 다른 이들의 생활에 웬만하면 엮이질 않는다.

내 사생활을 존중받고 싶어서 다른 이의 사생활을 존중하는 어찌보면 비굴한 처사인 것이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선지 그런 깍듯하고 좀스러운 내 생활 원칙이 깨지는 예외의 경우가 자주 생겼다. 늘 나만 잘 하면 되지 뭐! 했던 편협적인 시야에 못 마땅한 일, 경우에 어긋난 일, 무례한 일, 법을 어기는 일 그런 일들이 눈에 가시처럼 걸리적 거리는 것이다.

불의를 보면 용기있게(?) 꾹 참고 잘 넘기던 내게 작은 변화가 온 것이다. 내일이 아니면 눈살 찌푸리고 혹여 내게 오물이 튈까 바람처럼 잘 지나치고 겨우 글로나까발리던 비겁한 내가 행동 대장으로 나선 것이다. 나도 알 길이 없는 이 느닷없는 변화를 굳이 설명하려 든다면 산전수전 다 겪은 아줌마의 파워라고나 할까? 뭐, 죽기 밖에야 더 하겠어? 엉? 종종거리며 모이나 쪼던 집닭이 쌈닭으로 나는 건 맘먹기에 달려 있었을 뿐 그리 어렵진 않았다.

모처럼 한갓진 주말에 상큼한 봄나물이라도 살까 싶어 콧노래를 부르며 장을 보러 갔다.
장을 다 보고 카트를 끌고서 내 차를 찾지 못해 몇 바퀴 째 돌았다. 생각에 잠겨 차를 무심코 세워 둔 탓이었다. 주말이어선지 차들이 빼곡히 들어차 찾는 일이 더욱 힘들었다. 간신히 차를 발견하고 끙끙 카트를 밀고 가는데 마켓 입구 가까운 주차 공간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와, 이카노? 이기 무신 말도 안 되는 경우고! ” 무슨 일이지? 그냥 지나치려는데 뚝심있는 경상도 사투리가 쨍하고 터지며 내 발을 붙들었다.

사연을 듣고 보니 주차 공간에 세워뒀던 차를 후진하려던 운전자는 연세 지긋하신 경상도 아주머니였고 차를 들이대던 운전자는 히스패닉계열의 건장한 남성이었다. 가만 보아하니 그 아주머니가 차를 빼려는데 이 사내가 차를 꽁무니에 대고 위협적으로 빵빵 거리며 손가락 욕을 사발로 날리고 있었다. 딱 봐도 그 사내의 무경우한 댓거리였다. 차 진입 화살 표시가 나가는 표시로 돼 있는데도 불구하고 정 반대 방향에서 밀고 들어와선 빨리 차를 빼라는데 어거지도 그런 어거지가 없었다.

아주머니의 주장은“ 너에게 주차 공간을 줄 수 없다. 이 공간은 반대편에서 차를 몰고와야 주차가 가능하다. 더구나 내 차를 들이받을 듯이 나에게 공포심을 조장한 괘씸죄까지 추가해서 더욱 줄 수 없다” 대충 그런 요지였다. 히야, 고것참 희안테이! 시방 영어로 말씀하시는 거 아이가! 그란데 와 갱상도 말로 들리노?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그 진기한 경험에 취해 있을 새도 없이 사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분통을 터뜨렸다“.

주차 할 곳이 없어 10분도 넘게 빙빙 돌다가 간신히 빠지려는 차를 보고 황급히 운전해서왔는데 저 여자가 차를 안 빼고 차에서 계속 전화질이니 내가 열 안 받게 생겼냐? 날은 덥고 꼭지가 확 돌겠다. 빨리 차 빼라고~ 안빼?” 사내 또한 영어로 떠드는데 왜 또 $%^&^%$# 블라블라 스페니쉬로 들리냐!

암튼 경상도식 영어 버전 대표와 스패니쉬식 영어 버전 대표의 한 판 싸움이 벌어져서 싸움은 극을 향해 치닫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 아줌마가 왜 나서냐? 나서길! 겁대가리도 없이 이 아줌마, 짐이 잔뜩실린 카트로히스패닉 싸나이 차 앞을 확 가로 막았다.

“이봐요! 경찰 불러서 시시비비 따져 줄테니 꼼짝 말고 서 있으시우! 반 발짝도 움직이지 말고 알아들었수? 억울한데 그냥 가지말고 쪼매만 기둘리시우. 내 경찰이 오면 저 경상도 아줌마 몰아내고 저 공간에 아저씨 차 꼭주차할 수 있게 해드릴게!” 이렇게 호기롭게 멘트를 날리고선 전화기에 대고 다급히 경찰더러 와달라고 큰소리로 떠들었다.

일이 커지는 게 싫어서 911을 누르는 척만 했을뿐 순전히 공갈 협박이었다. 이 노련한 쌈닭의 곧추 세운 날개짓에 겁을 집어 먹었는지 그 사내는 예의 스페니쉬식 영어로 쌍욕을 하면서 카트를 쿵치며 붕~ 사라져버렸다.

하이고, 하마트면 비명횡사 할 뻔한 이 쌈닭!
고맙다는 경상도 아주머니의 인사도 온 몸이 후들후들 떨려서 뒷전이었다. 정작 고맙다는 인사는 고이 떠나준 온 몸에 문신을 새긴 그 사내에게 해야 할 판이었다. 이 쌈닭의 대 굴욕 누가 짐작이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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