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늬의 풀잎에 드는 햇살

사람들이 우리 집에 오면 의아해 하는 일이 한 가지 있다. 왜 빈방을 두고서 아이들을 한 방 쓰게 하느냐는 거다. 빈 방이 없다면 몰라도 버젓이 방을 비워두고 아이들을 한 방 쓰게 하는 걸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거다. 그러면 난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흐뭇한 자족의 미소로 답변을 대신한다. 아이들을 한 방을 쓰게 한건 다분히 의도적이다. 단촐한 식구에 형제라곤 딱 둘 뿐인 녀석들이 밥만 먹고 각자의 방으로 흩어져 하숙생처럼 군다는 게 생각만으로도 쓸쓸했기 때문이다.

터울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방 너머로 간간히 흘러 나오는 웃음소리, 티각태각 다투는 소리, 진지하게 속삭이는 소리…… 설사 말없이 있다하더라도 한 공간 안에 있는 한 서로에게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는 형제애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정경이 내겐 무척이나 뭉클하고 아늑하게 자리하는 탓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차적인 구실이고 정작 아이들을 한 데 몰아넣고 방을 늘 비워두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그 빈 방이 아버지가 가끔씩 지내시는 방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기거하셔봐야 고작 일 년에 한두 달, 언니네에 지내시다 노인 대학이 방학하는 동안뿐이지만 난 감히 아버지 방을 치우고 다른 용도로 사용할 엄두를 내지 않는다. 아버지의 빈 방을 들여다보면 쓸쓸하기 그지없지만 심란한 일이 있거나 괜히 울적해지면 나도 몰래 아버지 방에 찾아 들곤 한다. 아버지가 손수 쓰신 시들을 가만 읽어 보기도 하고, 너무 오래 써서 헐거워진 아버지의 돋보기안경의 힘없는 다리를 안쓰러이 만지작거리기도 하고, 아버지의 손때 묻은 성경책을 넘기다가 쪽잠이 들기도 한다. 아버지가 우리와 지내시다 오스틴 언니네로 내려가시면 한동안은 후유증을 앓곤 한다. 무심결에 식탁에 아버지 숟가락을 차려 놓거나, 습관처럼 “아버지 다녀올게요” 빈 방에 대고 인사드리다 말고 가슴 허전해지기 일쑤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언제 어느 때고 맘만 먹으면 오셔서 편히 지내실 수 있도록, 손님 같은 기분이 들지 않도록 빈방을 그대로, 아버지의 흔적 그대로 두고 있는 것이다. 무심한 아들 녀석도 그 방만은 할아버지 방이라며 제 친구들에게 신성불가침 지역이라도 되는듯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엄포를 놓는다.

얼마전 언니네가 새 집으로 이사를 가서 축하도 해 줄겸 맘먹고 놀러 갔다. 그 전 살던 데보다 전망도 좋고 내부도 요모조모 실속 있게 꾸며져 한결 좋아 보였다. 그런데 뭔지 모르게 썰렁하다 싶어 찬찬히 훑어보니 그 많던 텔레비전이 싹 자취를 감추고 없는 것이다. 안방이고, 거실이고, 곳곳에 놓여 있던 텔레비전이 말이다. 어찌된 영문인지 언니에게 물으니 의미심장한 웃음을 띄고 아버지 방을 가르킨다.

못내 궁금해서 선 걸음에 아버지 방을 들여다 보니 거실에 놓여 있던 대형 텔레비전이 거구의 위용을 떨치며 떡하니 들어서 있다. 제일 큰 놈 한 대만 아버지 방에 들여놓고 나머진 전부 창고에 처 박아뒀다는 것이다. 언니가 왜 그랬는지는 아버지 방을 들여다 보며 금세 해답을 찾았다. 깔깔깔, 까르르르, 하하하, 와르르 터지는 웃음들. 아버지를 중심으로 큰 손녀, 작은 손녀, 사위에다, 놀러간 우리 아이들까지 방안이 시끌벅적 사람 온기로 꽉 차 있다. 아버진 여느 부자가 부럽지 않은듯 만복한 얼굴로 노곤히 웃고 계신다. 아하! 역시 언닌 지혜로운 딸이다. 어머니가 떠나신 후 늘 썰렁하기만 하던 아버지의 방. 좋아하시는 책이며 화초, 분재등 그 무엇을 들여놔도 어머니의 빈자릴 메우진 못해 늘 가슴 아팠었는데…. 손녀들, 사위, 딸 너나 할 것없이 외출 전후 빠꼼히 내다보고 겨우 아버지께 문안 인사나 여쭙고 뿔뿔히 흩어지고 마는데 아버지 방에 텔레비전이 놓인 후론 모두 약속이나 한듯 슬금슬금 아버지 방으로 모여 든다는 것이다.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 모여들긴 했지만 자연스레 아버지랑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고 간식도 같이 먹게되고 이러저런 얘기도 나누게 되어 아버지 방은 늘 식구들로 북적거리기 마련인 모양이다.

텔레비전을 바보 상자라 경시하고 우리 집에선 단절한지 오래 되었건만 이 날 만큼은 그 바보 상자가 듬직한 장남의 어깨처럼 그렇게 든든하게 여겨질 수가 없었다. 언니의 지혜로 바보 상자가 톡톡히 효자 노릇을 하고 있는 셈이다. 집에 돌아가면 아버지의 빈 방에도 저 듬직한 효자를 들어 앉혀 나도 덕 좀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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