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늬의 풀잎에 드는 햇살

모처럼 시간을 냈는데 다니던 단골 미용실이 휴일이었다. 맘먹은 김에 머리를 손질하려고 새로 생긴 동네 미용실로 갔다. 그런데 그만 서로 의사 소통이 잘 안 되선지 아주머니는 내 머리를 폭탄맞은 것처럼 만들어 놨다. 맘에 안 들고 속상해서 속에서는 무수한 말들이 부글거리고 있었지만 소심한 내가 한 말은 결국 고르고 골라 “애쓰셨습니다” 였다. 이미 잘라 버린 머리를 붙여 달라고 떼를 써도 안 될일이고, 하는 사람은 나름 최선을 다해 정.성.껏 하고 있었기에 딴지를 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맘에 안들어요”가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지 않은가! 콧망울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 화운데이션이 밀렸어도 어쩌지 못하고 내 머리 만들기에 온 신경을 집중하시던 아주머니! 막 초보 딱지를 떼고 실전에 나선 운전자처럼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온 마음을 기울이는 게 확연히 보였다. 항상 과정 지향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결과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입버릇처럼 울 애들에게 강조해놓고 말과 달리 처신을 할 수 없었던 이유도 한 몫 했다.

내 속내를 모르는 아주머니는 사자 머리처럼 내 머리를 부풀려 놓고 아주 흡족해 하는 표정으로 “당장 미스코리아 심사위원으로 나가셔도 되겠다”고 추켜 세운다. ‘미스코리아로 나서도’라고 할래다 늙은 내 얼굴을 의식해서 살짝 말바꾸기를 한 티가 팍 났다. 이왕 마음을 숨긴 거 끝까지 속내를 감추고 “고마워요” 답례의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해야 했던 비운의 하루!

거울엔 늙고 성난 사자 한 마리가 갈기를 잔뜩 부풀린 채 들어 앉아 있었다.
내 아픔을 겪고 나니 다른 사람의 아픔에 비로소 절실히 공감 되는지 벌써 십년도 더 된 일이 떠올랐다.
미국에 막 와서 난감한 일 중 하나는 ‘머리자르기’ 였다. 길도 모르고, 정보도 모르고, 말도 안되고.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차도 없고, 황금같은 기회의 일요일엔 모두 다 문을 닫고……할 수없이 난 멋이고 뭐고 간에 머리를 길러 질끈 묶어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일곱살 박이 아들 녀석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들녀석 머리는 자꾸만 더부룩해져 그야 말로 봉두난발. 더 이상 두고 볼 수만은 없어 궁여지책으로 내가 가위를 빼들 수밖에 없었다. 머릿 속으로 대충 밑그림을 그린 다음 아들놈을 거울앞에 앉혔다. 아들 녀석이 자못 못미더운 눈으로 날 바라본다. “걱정마, 언제 엄마가 하라는대로 해서 손해 본 적 있어?” 딴에는 맞는 말인지 마지못해 머리를 대주는 아들 녀석. 무려 한 시간에 걸쳐 자른 머리는 그런대로 윤곽이 잘 잡혔다. 그 놈의 시간이 문제였지 아주 솜씨가 없진 않아 봐줄만 했다.

그런데 녀석의 잘난 뒷통수가 살아나지 않은게 영 못마땅했다. 내가 다시 윙 기계를 대려하자 주리를 틀던 아들놈이 기겁을 한다. 이제 더는 못 참겠다는 것이다.
이 번엔 진짜 마지막이라며 간신히 꼬드겨 마무리 작업에 들어갔다. 침을 꼴깍 삼켜가며 조심스럽게 기계를 대는데 그만 아들놈이 꾸벅 고개를 떨구었다. 저도 몰래 졸음이 몰려온 것이다. 이를 어째, 녀석의 뒷꼭지에 그만 한 줄기 허연 길이 나버렸다. 도저히 어떻게 손쓸 도리가 없는 길이 나버린 것이다. 할 수 없이 그 길을 따라 녀석의 머리를 빡빡 밀 수밖에 없었다. 조는 애를 배에 받쳐들고 깎느라 얼마나 용을 썼는지 몸살이 다 났다. “자! 드디어 다 됐다. 어이, 꼬맹이 어서 일어나 샤워해”

잠결에 비칠비칠 욕실로 들어가는 녀석. 잠시후 ‘으악’ 비명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발가벗은채 녀석이 뛰쳐 나온다. “마암!! 왜 내 인생을 망쳐 놨어. 흑, 난 어떡하라구. 흑흑, 내 머리 돌려놔. 내머리… 내 인생… 으ㅡ왕”
한 번 망쳐버린 놈의 인생은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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