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전어의 계절이다. ‘가을 전어는 며느리 친정 간 사이에 문 잠그고 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전어는 가을이라야 제 맛이다. ‘가을 전어 머리에는 깨가 서 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며 ‘봄 도다리, 가을 전어’라는 말도 가을 전어의 가치를 잘 나타내주는 말이다.
서유구는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서 “전어는 기름이 많고 맛이 좋아 상인들이 소금에 절여 서울까지 가지고 와서 파는데, 사는 사람들이 돈을 따지지 않기 때문에 전어(錢魚)라고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유명한 조헌은 그의 문집 ‘동환봉사(東還封事)’에서 “경주에서 가을 전어는 명주(비단) 한 필을 주고 바꾸고, 평양의 동수어(冬秀魚)는 정포(무명) 한 필로 바꾼다.”고 했다. 동수어는 겨울에 잡아 말린 숭어를 말한다. 그러니 전어가 얼마나 비싼 고기였는지 알 수 있다.
‘별주부전’에서 용왕의 이야기를 토끼에게 전하는 물고기가 전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경상도 사천에 있는 비토(飛兎)섬이 별주부전의 고향이라는데, 역시 사천의 늑도 징검다리 섬에 전어와 관련된 마고할미 설화가 전해오는 것을 보면 사천 앞바다 일대에도 전어가 많기는 많은가 보다.

옛날 지리산 노고단에 마고할미가 살고 있었다. 마고할미는 하늘도 없고 땅도 없는 세상에서 잠을 자면서 코를 골았는데, 그만 하늘이 내려앉아 혼돈 상태로 빠뜨렸다고 한다. 깨어나면서 하늘을 다시 밀었더니 갈라지면서 해와 달이 생겼다. 마고할미는 땅을 긁어 산과 강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지리산 노고단에서 지냈던 것이다.
하루는 마고할미가 심심하던 차에 바다 구경을 가고 싶었다. 그래서 한 걸음 펄쩍 뛰었더니 삼천포(지금의 사천)였다. 그런데 마고할미가 펄쩍 뛰는 바람에 파도가 일어 바다에 떠 있던 배가 뒤집힐 뻔하였다. 마도라는 섬에서 육지로 나가던 배였다. 미안해진 마고할미는 마도에서 육지로 나가는 징검다리를 놓아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지리산에 있는 바위를 치마에 싸서 징검다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징검다리를 거의 완성시킬 즈음 바다 멀리서 하얀 물결이 일었다. 전어 떼였다. 전어 떼가 몰려오자 마고할미는 더 이상 다리를 놓아서는 안 될 것 같아서 그만두고 말았다. 그것이 지금 사천 늑도 앞의 징검다리 섬이다.

전어와 관련된 이야기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가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온다’는 이야기이다. 전어 굽는 냄새는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오게 할 정도라는 이야기이다. 전어로 유명한 광양 망덕포구에는 전어구이와 관련된 며느리 이야기가 전해온다.

조선 선조 20년(1587년), 광양 망덕 포구에 한 바탕 잔치가 벌어졌다. 김씨 집 큰 아들 진명이가 장가를 갔기 때문이다. 구례 송씨 집안에서 시집 온 며느리 여주는 한눈에 보기에도 예쁘장한 것이 남편은 물론 시부모 사랑도 독차지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며느리가 들어왔는데도 시아버지는 물론 시어머니까지도 며느리를 상전 모시듯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진명이가 3대 독자이기 때문에 며느리가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하나 탁 낳아주길 바랐기 때문이다.
여주가 시집 와서 가장 달라진 것은 음식 문화였다. 구례에서는 본 적도 없는 김이나 전어 같은 음식을 많이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광양에서 김이 본격적으로 양식된 것은 1650년경이지만 이미 그전부터 자연산 김으로 김을 만들어 먹었다. 전어 역시 망덕포구에서 가장 많이 잡히는 어종이었기에 망덕 일대에서는 다양한 전어 요리를 해먹었다. 여주는 김도 김이지만 전어구이에 특히 반했다. 그런 여주를 본 시부모는 가을 전어철이면 하루도 빠짐없이 전어구이를 해주었다.
그런데 여주가 시집 온 지 벌써 3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아이 소식이 없자 시부모의 태도도 점차 변하였다. 시아버지는 내심 못마땅해도 내색을 하지는 않았지만 시어머니는 점차 노골적으로 여주를 구박하기 시작하였다. 지난 3년 동안 부엌일도 거의 시키지 않고 상전 받들 듯 하였는데, 이제는 아예 몸종 부리듯 하였다. 그런 시어머니의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여주는 속상할 때가 많았다. 그럴 때면 구례에 계시는 부모님 생각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러던 어느 가을날, 그 날도 시댁에서는 어김없이 전어구이를 먹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여주를 아무도 챙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에는 전어구이를 좋아하는 며느리에게 시아버지가 자기 몫을 양보하기도 하였는데, 이제 여주 앞에는 전어가 아예 놓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여주가 헛구역질을 하였다. 전어구이가 먹고 싶어서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여주를 못마땅한 듯 쳐다보던 시어머니가 왜 그런지 곰곰이 살펴보더니 갑자기 표정이 확 바뀌면서 말하였다.
“아니, 아가. 혹시 임신 한 것 아니니?”
정말 임신이었다. 3년 만에 여주가 임신을 한 것이다. 그러자 시어머니의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 다시 처음처럼 여주를 보물단지 떠받들 듯하였다. 다음날 아침 일찍 여주는 부엌에 나갔다. 지난 몇 개월 동안 구박을 당하다보니 여주는 이제 새벽만 되면 일어나 본능적으로 부엌으로 달려가는 버릇이 생겼다. 그런데 여주가 부엌에 가보니 이미 시어머니가 나와 계시는 것이 아닌가.
“아니, 아가. 뭐 하러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어서 들어가 조금 더 쉬어라. 걱정 말고.”
그런 시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여주는 그 동안 마음 고생했던 아픈 기억이 한순간에 눈 녹듯 사라지고 말았다. 남편 진명 역시 일이 끝나면 주막에도 가지 않고 곧바로 집으로 들어왔고, 시아버지도 이제는 여주에게 다시 전어 접시를 밀어주곤 하였다.
전어가 익어가는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되었다. 망덕포구에 유례없이 많은 눈이 내렸다. 사람들은 내년 전어도 풍어가 될 것이라며 기뻐했다. 여주 시댁 식구들도 내년에 태어날 아이를 생각하며 여름을 기다렸다. 의원의 말에 따르면 내년 여름이 산달이었기 때문이다.
여름이 왔다. 망덕포구의 여름은 구례의 여름과는 달랐다. 수목이 울창한 구례의 여름이 매미 울음소리라면, 바다가 훤히 보이는 망덕의 여름은 갈매기 울음소리였다. 드디어 진명이네 집에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응애! 응애!”
그날 진명이네 집에는 고추 대신 숯과 솔잎이 걸렸다. 여주가 아들이 아닌 딸을 낳았기 때문이다. 딸을 낳자마자 시어머니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었다. 임신하기 전보다 더 나빠졌다. 하지만 여주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내심 기대를 하였다가 실망을 해서 그런지 진명이도 겉돌았다.
딸을 낳고 3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시어머니의 구박은 멈출 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이다. 진명이도 전라좌수영에 편입되어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부대에 편입되었다. 그런데 진명이가 그만 적군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고 말았다.
진명이가 전투에 나가 목숨을 잃자 시부모의 구박은 더욱 극심해졌다. 아들을 못 낳는 것도 문제이지만 이제는 남편 잡아먹은 아내라는 오명마저 쓰게 되었던 것이다. 꼼짝없이 대가 끊이게 된 여주 시부모는 사사건건 여주를 못살게 굴었다.
결국 그해 여름, 여주는 딸을 데리고 집을 나가고 말았다. 처음에는 구례 친정으로 갈까 생각도 했지만, 막상 친정으로 가자니 아버지나 어머니 걱정할 것이 너무나 분명하여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여주는 시부모 몰래 망덕 인근에 초가집을 짓고 살았다. 언제든 시부모님 화가 풀리면 돌아가서 모시고 살 생각이었던 것이다.
어김없이 가을이 돌아왔다. 아들도 죽고 며느리도 집을 나가 사람 사는 집 같지 않았지만 그래도 전어구이는 여전하였다. 전어를 굽던 시어머니도 여주를 떠올렸다. 비록 아들을 낳지는 못하였지만 착하디착한 며느리가 불현듯 보고 싶어졌다. 전어구이를 그렇게 좋아했던 며느리가 아닌가. 더구나 국가적인 변란을 당해서 아들이 전사한 것이 꼭 며느리 잘못만은 아니지 않는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시어머니는 전어를 구우면서 눈시울을 적셨다.
밥상을 받아든 시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밥상에 가득 놓인 전어구이를 보고는 시아버지 역시 며느리 생각에 목이 잠겼다.
“거, 전어 한 번 통통하게 생겼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통통한 전어구이를 좋아했던 며느리 얼굴이 눈에 선하여 시아버지 역시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때 갑자기 여주가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뜻밖의 일이라 시아버지도 시어머니도 여주를 반겼다. 그 동안 자신들이 구박을 해서 여주가 집을 나갔다는 생각보다는 며칠 나들이 다녀오는 며느리를 반기는 분위기였다.
사실 요 며칠 여주도 웬 일인지 시부모님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비록 구박이 심하시기는 했지만 그것은 대를 잇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이고 자신이 미워서 그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더구나 아들마저 전쟁 통에 목숨을 잃었으니 그 심정이 오죽 하실 것인가. 자신이 봉양해야 하는데 늙으신 시부모님 두 분이서 어찌 사시는지도 궁금하고 해서 몰래 살펴보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부엌에서 시어머니가 전어를 구우니 여주의 입 가득 침이 고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전어 냄새에 끌려 집안으로 들어가고 만 것이다.
전어구이 때문에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오고, 비록 아들은 아니지만 눈에 넣어도 아플 것 같지 않은 손녀딸도 다시 찾게 된 시부모는 여주를 친딸처럼 생각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때부터 광양 망덕포구 일대에서는 ‘전어 굽는 냄새에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온다’는 말이 퍼지게 되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이와는 전혀 다른 내용의 설화가 전해온다. 일본에서는 전어를 거의 먹지 않는다고 한다. 특히 구이로는 절대 먹지 않는다. 전어 타는 냄새가 사람 시체 타는 냄새와 비슷하다는 이유 때문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기 직전, 일본 중부 지방의 소국인 하야국(下野國) 바닷가 마을에 예쁜 외동딸을 둔 노인이 있었다. 늘그막에 둔 딸인데다 예쁘기까지 해서 노인은 금이야 옥이야 하고 끼고 살았다. 나이가 들수록 딸의 미모는 더욱 빼어나게 되었고, 급기야 하야국 일대에 그 미모가 파다하게 퍼졌다.
그러자 탐욕스럽기로 소문난 영주가 그 소문을 듣고 자신의 첩으로 삼고자 하였다. 당시 지방 소국의 영주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지 자신의 첩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다음 달 보름까지 딸을 영주의 성으로 보내라고 하명하였다. 영주의 명을 거역하는 것은 곧 죽음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노인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였다.
정해진 날짜가 다가오는데도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고민하던 노인은 “딸이 갑자기 병이 들어 죽었다”고 소문을 냈다. 그래서 이틀 후에 딸을 화장한다고 영주에게 알렸다. 소문난 미색을 첩으로 삼을 기대에 부풀었다가 실망을 하게 된 영주는 그래도 뭔가 미심쩍었는지 부하를 보내 확인하게 하였다.
영주의 부하가 사실 확인 차 온다는 말에 노인은 빈 관에다 물고기를 가득 넣고는 화장을 하였다. 바로 전어였다. 평생을 어부로 살았던 노인은 전어를 태우면 사람 시체 태우는 냄새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관 가득 전어를 채워서 화장을 하였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냄새를 맡아보니 화장을 하는 것이 분명하여 부하가 돌아가서 영주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그렇게 해서 노인의 딸은 영주의 첩으로 잡혀갈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때부터 자식 대신 태운 고기라고 해서 전어를 고노시로(子の代)라고 불렀고, 일본 사람들은 그래서 전어구이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제공=설화와 인물
<이 기사는 ‘월간 설화와 인물’과 콘텐츠 협약에 따른 것입니다>

저작권자 © 광양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