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육십갑자(六十甲子)전인 1895년 을미년 양띠 해 속칭 ‘여우사냥’인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120년 전에 한반도를 강타했다. 일제로부터 조국을 강탈당한 1919년 기미년 양띠 해엔 조국의 독립을 꿈꾸는 민중들이 3ㆍ1운동을 펼친다.

광양에서도 1919년 독립운동이 지리적 여건 한계와 일본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광양장날인 3월27일(음력2월26일) 꿈틀대기 시작해 4월4일에는 장터에 천여명이 움집해 독립의 열망을 표현했다. 이때 맹활약했던 이들을 추모하는 ‘오의사(五義士)’와 ‘칠의사(七義士)’ 3ㆍ1운동 기념비가 남아 있다.
1931년인 신미년 양띠 해에는 지난해 별세한 광양의 자랑인 중요무형문화재 제60호 장도장 박용기 명인이 태어난 해이다.

광양 매실과 홍쌍리 여사는 양띠 띠동갑
1931년 신미년엔 일본에서 광부 생활을 하다 귀국한 율촌 김오천 선생이 일본에서 밤나무 묘목 1만 그루와 함께 들여온 매실나무 5천 그루를 심으면서 광양의 매실이 시작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리고 광양의 ‘봄 매화 여름 매실’을 만들어 낸 사람이 경남 밀양에서 광양으로 시집을 온 율촌선생의 자부(子婦) 홍쌍리 여사이다. 홍 여사는 1943년 계미년생으로 광양 매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양이 맺어준 띠동갑의 운명이었다.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펼친 광양기독교
일제의 징병ㆍ징용이 강제되고 신사참배가 한참 강요되던 1943년 신미년 양띠 해엔 진상면 출신 안윤덕 목사가 목포지방에서 부흥회하든 중 “천황은 신이 아니다. 2~3년 내에 일본이 망하고 조선도 해방을 맞는”고 예언해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르다 옥중에서 해방을 맞는다.

진월면 출신 양용근 목사는 1940년에 고흥지방의 연합 도사경회에서 신사참배 반대를 주장했다. 이것이 결국 반일사상과 불경죄로 체포돼 광주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다 해방된 조국을 보지 못하고 1943년 12월 5일에 차가운 옥중에서 생의 최후를 마치는 순교를 한다.

신라 경문왕 때 도선(道詵)이 창건한 중흥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과 의병이 머물면서 중흥산성을 지켰으나 왜병과 격전을 벌이다 승병들은 순절하였고 절은 불탔다. 그 뒤 작은 암자를 건립해 명맥을 이어오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1943년 다시 폐허가 된다.
또한 광양남초등학교가 개교했고 구 광양읍사무소(현 광양문화원)가 준공됐다

회갑 맞이하는 광양숯불고기
1955년 을미년에는 광양의 전통 향토음식인 광양숯불고기가 재래식 고기구이에서 현대식으로 바뀌는 원년이기도 하고 ‘삼대불고기’의 시작이기도 하다.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광양불고기의 명성에 따라 숯불고기 식당들 간에 ‘원조논쟁’이 일어날 조짐도 보인다.

광양 출신으로 5ㆍ18 민주화운동을 다룬 ‘꽃잎처럼’과 장편소설 등을 쓴 박혜강 작가가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

광양에서 첫 기차 구경
1967년 정미년 양띠 해에는 경선선 구간인 순천~광양 철도가 개통돼 처음으로 광양군민이기차를 타는 해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는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 그때의 경전선이 폐선 되고 그 부지를 관광 상품으로 만들어 활용하자는 논의가 진행 중이다.

또한 봉강면 위치한 백운지는 광양시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준계곡형 저수지로 1967년에 30만평 규모로 준공됐다. 1980년대는 향어 가두리가 있었을 때에는 전국 낚시꾼들에게 꽤 인기 있었으나 가두리 양식장이 철거되고 1992년 가뭄으로 바닥을 보여 매니아들의 발길이 끊겼으며, 10여년 전 외래종인 배스와 블루길이 유입되면서 붕어낚시인들은 거의 자취를 감췄다.

황충재를 기억하시나요?
1979년 기미년 양띠 해에는 태인도 출신 복서 황충재 선수가 온 국민을 TV 앞으로 모여들게 했다. 아미추어부터 차근차근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황충재는 당시 황금체급으로 불렀던 웰터급 선수로서 1978년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전 국민의 영웅적인 존재로 변했다. 그리고 1979년 프로로 전향해 연전연승으로 동양태평양타이틀매치(OPBF) 챔피언까지 오른다.

1979년 진월면은 처음으로 양상추를 생산해 미군부대에 납품했다. 현재에도 전국 생산량의 24%, 국내 햄버거 4개중 1개에는 광양산 양상추가 들어있다.

1979년 7월24일에는 제2제철소 대상지로 아산만이 최종 결정됐고 8월에는 제2공장의 건설을 위한 건설사무소가 설치돼 본격적인 조사를 시작했으나, 10ㆍ26사건과 제2석유 파동의 내우외환으로 순연돼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광양군과 동광양시 분리 처음이자 마지막 선거
1991년 신미년 양띠 해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광역ㆍ기초의원 선거가 분리돼 치러졌다. 1989년 광양군에서 동광양시가 분리ㆍ승격된 결과로 광양군과 동광양시가 독립 지자체로 운영됐다. 특이한 점은 1991년 선거에서 동광양시에 출마한 민자당(새누리당 계승) 최흥훈 후보가 당선됐다. 이는 여전히 7대 도의회까지 지역구 출신으로 유일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또한 백운장학회도 1991년 설립돼 교육자치 도시로서 경쟁력을 갖추는 디딤돌을 놓았다.

기회의 땅 광양 경제자유구역지정
2003년 계미년 양띠 해엔 광양시 870만평이 광양만권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됐다. 또한 청사도 11월3일 광양시 제2청사로 입지가 확정됐다.
여수세관 광양출장소가 광양세관으로 2003년 7월 승격됐다. 이는 광양항 개항 이후 동북아 허브항만이라는 광양항의 목표에 걸맞은 수준의 관세행정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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