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호남을 아우른 대접주 김인배

역사의 오늘.
121년 전, 갑오년인 1894년 음력 12월 6일 광양군수 객사(客舍) 앞마당에서 수많은 백성들이 눈물을 훔치
면서 지켜보는 가운데 스물다섯 꽃다운 젊은이가 망나니의 시퍼런 칼날에 목이 베여 선혈이 뚝뚝 떨어진 채 푸른하늘 아래 효수됐다.

1894년 음력 12월 6일은 양력 1월 26일이고 광양군수 객사 자리는 현 광양문화원 뒤 시장관사이다.

녹두꽃처럼 살다 쓰러져간 영호남을 아우른 지도자 영호대접주 김인배 그의 짧지만 강렬한 삶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김인배를 비롯한 농민군 100여명이 김석하 전 광양군수가 이끄는 민보군에 체포됐다.

바로 그날 김인배는 처형되어 객사에 효수됐다.

김인배 대접주 그는 누구인가?
김인배는 전북 금구(김제군 봉남면 소재)에서 1870년에 출생해 1891년에 동학에 입도하였고 1894년에 광양에서 효수됨으로써 생을 마쳤다.

김인배는 농민군 통치가 이루어질 시기에 순천, 여수, 광양, 하동 일대를 석권하고 농민군의 후방을 책임지는 역할을 맡았었다.

그러한 김인배의 직책은 '영호대접주'로서 영남과 호남을 아우르는 지도자였다는 뜻이다.

김인배는 전봉준·손화중 장군과 더불어 동학농민운동을 이끌었던 3대 거두인 김개남 장군(1853~1894)과
전라좌도를 중심으로 책임지고 함께 활동했다.

전봉준·손화중 장군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자 그 휘하의 농민들은 흩어지지만 봉건제와는 철저하게 비타협적이었던 김개남 장군과 김인배 대접주가 이끈 농민군은 지라산 등으로 들어가 이후 의병운동과 항일운동을 이끄는 주력이 됐고 일제시대엔 사회주의계열의 독립운동 정신으로 이어진다.

황현 선생과 김인배 대접주

매천 선생이 지은‘ 오하기문’엔 다압 도사리에 있는 섬진나루터 전투가 기록돼 있다. 섬진나루는 과거 섬진진이 자리했던 곳으로 광양과 하동을 오가는 지리적으로 요충지였다.

1894년 음력 9월 이후 영호도회소 동학농민군들이 경상도 서부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해 관군 및 민포군 등과 전투를 벌인 곳이다.

아쉬운 것은 황현 선생이 매천야록에서 동학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인 자세를 보여 동학교도를 동비(東匪)로 표현하고, 어윤중이 장계에서 동학교도를 가리켜 비도(匪徒)라 하지 않고 민당(民黨)이라 한 것을 비판했다는 것이다.

시간차를 두고 한 사람은 역사의 기록자로 한 사람은 농민의 꿈을 향해 광양 역사 시간 속에 있었다는 것이다.

광양 동학농민혁명 김인배 대접주에 이어 봉강면 박흥서 접주, 인덕면 성석하·박소재·박치서 접주, 사곡면 한군협·한진유 접주, 옥룡면 서윤약 형제·이중례·하종범 접주 등 약 100여명의 농민군 역시 잇따라 처형되거나 포살됐다.

역사는 쓰여질 당시엔 승자의 기록일 수는 있다. 그러나 순진한 백성들이 분노해 죽창을 만들고 낫을 들고 관아를 습격하는 아픔을 제대로 기록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들이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동학농민을 제압한 공덕비는 곳곳에 있으나 민중의 아픔과 함께 해 봉건 압제에 항거한 이들의 모습은 구전으로 전해 오다 최근에야 곳곳에 기념비와 기념관도 세워지고 있고 유적지도 관광 상품화되고 있다.

김인배 대접주는 광양에 사는 우리에게도 낯선 이름일 수 있다. 스물다섯 꽃다운 나이에 녹두꽃처럼 쓰러져간 이를 기억하고 그가 효수된 거리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다.

역사학자 이이화 교수이다. 이 교수는 ‘대접주 김인배, 동학농민혁명의 선두에 서다’는 이미 10여 년 전에 출판해 많은 이들이 김인배 대접주를 기억하게 했다. 그러나 김 대접주가 한 많은 생을 마감한 광양에서는 그의 작은 흔적을 찾아 볼수 없다.

없는 역사를 가공해서라도 관광 상품을 만들려는 지자체들이 있다. 그러나 있는 것조차 방치해 버리고 외면해 버리는 광양의 역사 인식 현주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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