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하 노피곰 도다샤 - 액운 물리치고 풍년과 가족 건강 기원

긴 겨울 짧은 해에 기대어 농한기 농민들은 농악을 즐겼다. 듣거나 관람하는데 머물 수 없는 게 바로 우리 농악이다.

상쇠가 꽹과리를 두드리면 북과 징, 장구가 따라붙어 신명을 만들어 내니 어깨에 절로 흥이 들어가고 몸이 어느 새 덩실덩실 춤사위를 불러일으키다가 사람들과 매구꾼들이 한바탕 대동을 이루는 것이 바로 우리네 농악인 것이다.

꽹과리, 징, 장구, 북, 소고 등 4가지 타악기를 기본으로, 농악은 두드림이 주는 강렬한 울림을 통해 사람들 속에 담긴 신명을 끌어내고 이 신명이 흥겨운 어울림을 빚어내는 힘을 지녔다는 것은 한민족이라면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다.

농악은 각 지역마다 농악이나 굿, 풍장, 풍물, 두레, 매구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왔고, 또한 각 지역마다 다양한 가락과 흐름을 지닌 채 지금에 이르고 있다.

크게는 경기농악·영동농악·호남우도농악·호남좌도농악·경남농악·경북농악으로 갈라지고 또 그 안에서 각 지열별로 수많은 지류들이 또 갈라지는데 광양 역시 우산농악, 용강 버꾸놀이, 해창 매구 등 산과 개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서도 저마다 다른 가락과 지역적 특성을 갖고 수 백 년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 만큼 우리 농악은 그 지역의 자연생태와 환경, 사람과 토양의 기질적 차이에 따라 발전하면서 수만 가지 형태로 문화를 축적하고 내공을 키워왔다고 할 수 있을 터이다.

▲ 해창 매구 상쇠 문문회 씨
정월 대보름을 앞두고 광양읍 세풍리 세풍초등학교 앞 어둠이 내리고 있는 세풍벌에 신명난 농악이 거친 바람을 가르고 울려 퍼졌다. 올 한 해 풍년과 주민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굿판이 벌어진 것인데 굿판을 이끌고 있는 사람들은 해창마을 매구패다. 매구패가 굿판을 벌리기 시작하면 본격적인 달집태우기 행사가 시작되니 악귀는 물리치고 복을 불러들이는 첫 마당을 여는 게 바로 이 판굿이다.

변화무쌍한 가락이 회오리를 일으킨다. 절로 어깨춤이 일렁인다. 해창마을 매구는 한 장단만 계속 반복되는 것을 외가락을 피해 가락을 길게 내거나 리듬감을 고조시키다가 가락을 변화시켜 굴리는 등 푸는 가락과 맺는 가락이 뒤섞이는데 상쇠를 따라 일으키는 매구패의 동작도 느림과 빠름을 반복하며 신명을 돋운다.

해창마을의 매구는 꽹과리가 주가 되며, 꽹과리 제1주자인 상쇠가 매구패를 지휘하는데 그 뒤로 꽹과리재비, 징재비, 장구재비, 북재비, 소고재비 순으로 서서 판을 벌리는 게 특징이다.

이날 달집태우기 행사의 첫 장을 연 해창마을의 농악은 다른 지역과는 달리 매구라는 이름으로 불려왔다. 해창 매구는 음력 정월 초이튿날 당산제를 시작으로 한 해 굿판을 시작한다.

한때 광양우산농악과 함께 광양의 양대 농악으로 불릴 만큼 규모가 크고 신명이 남달랐던 것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해창 매구는 이 당산제 판굿으로 시작해서 길놀음과 집돌이(지신밟기)로 끝난다. 이렇게 시작한 집돌이는 정월 초사흘부터 시작해 가가호호를 돌다보면 대보름이 가까워서야 행사를 마칠 만큼 성대했던 것으로 전해온다.

해창마을의 당산제는 음력 정월 초이튿날 300여 년의 세월을 꿋꿋하게 견딘 마을회관 옆 당산나무에서 열리는 제사다. 제주(祭主)는 집안에 유고가 없는 사람을 선발해 세우고 제를 지내기 일주일 전부터 색을 멀리하고 목욕재계를 하도록 하는 등 엄격했다. 당산제는 그만큼 해창마을의 중요한 행사였고 이 당산제의 백미는 이끄는 것이 바로 해창 매구였다.

매구패들이 농자천하지대본이라고 쓴 대기(大期) 따위를 앞세우고 당산나무 앞마당에서 한바탕 판굿을 벌인 뒤 마을우물을 돌고, 집집을 방문해 대문굿과 마당굿, 성줏굿, 조왕굿, 터주굿, 장독굿, 측간(화장실)굿 등 지신밟기로 끝을 맺는다.

해창 매구를 이끌고 있는 신우수(61) 단장은 “어린 시절을 생각해 보면 한번 집놀음을 할라치면 마을어른들은 물론 아이들까지 매구패를 따라 한바탕 마을잔치가 벌어졌다”며 “다른 지역에 비해 장단이 빠르고 흥이 커서 신명나기 이를 데 없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현재 해창 매구는 옛날 장단을 잃어버렸다. 몸과 흥을 통해 전해왔던 해창 매구는 산업화를 겪으면서 젊은 세대들이 마을을 빠져나가고 매구패가 없어지면서 40년 가까이 맥이 끊겼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두 해전부터 신 단장을 비롯해 동갑내기인 상쇠 문문회 씨, 강대길 김공섭(59) 씨 등이 주축이 돼 해창 매구패를 다시 조직해 옛 해창 매구가락을 복원하기 위해 열정을 쏟고 있다.

상쇠 문 씨는 “세풍행사에 해창 매구가 아닌 외지 농악패가 들어와 마당을 펼치는 것을 보고 문득 자존심도 상하고 안타까웠다. 그래서 어린 시절 해창 매구를 기억하는 마을 친구들끼리 해창 매구를 다시 시작해보자고 뜻을 모았다”며 “지금은 무엇보다 옛 장단의 원형을 찾아내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 어린 시절의 기억만으로 장단을 복원하기가 쉽지 않지만 살아계신 마을 어르신들을 찾아다니며 조언을 구하고, 다른 지역 농악패도 찾아다니며 장단 복원을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다”고 덧붙였다.

무엇보다 다행스러운 건 마을청년들이 해창 매구를 살리기 위해 모여들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 7명으로 시작했던 해창 매구패는 청년들의 합류로 23명으로 확대됐고 그 덕분에 매구의 구성진 가락이 힘을 얻고 있다. 합류하고 있는 이들이 모두 젊은 세대들인데다 열정도 남다르다는 것도 반가운 소식이다. 해창 매구패는 한 달에 두 번 마을회관을 연습실로 빌려 활동하고 있는데 보통 7시에 시작하면 열시가 넘어야 연습이 끝난다.

해창마을 출신으로 현재 매구를 배우고 있는 김도근(36) 씨는 “해창 매구는 속도가 빠르고 경쾌해서 배우는 내내 흥에 빠져 산다. 마치 신들리는 느낌마저 들 때가 있다”며 “우리 마을의 소중한 문화유산인 해창 매구를 지키는 일은 우리 스스로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 단장은 “해창 매구는 길놀음과 집돌이가 중심인 된 농악이다. 보다 많은 회원들을 확보해 매구패 뿐 아니라 포수와 무동 등 잡새들도 세웠던 해창 매구의 전통방식을 지켜내는 게 급선무”라며 “소망이 현실이 된다면 온 마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함께 참여하는 대규모 매구놀이를 펼쳐보고 싶다”고 밝혔다. 또한 “세풍초등학교에서도 농악을 배우고 있는 만큼 아이들에게도 해창 매구를 전해주고 싶다”며 “지역의 자랑스러운 전통문화인 만큼 광양시민들과도 이 신명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 해창마을 김철건 청년회장
“잊혀져가는 우리가락 젊은이가 지켜야죠”

그는 북재비다. 마을 청년회장을 하면서부터였으니 우리 나이로 마흔 둘에 처음 북채를 잡았다. 이제 2년을 조금 넘긴 셈이다. 처음부터 북이 좋았고 북이 내는 소리에 여전히 가슴이 설렌다.

철건(44)씨는 “마을 청년회장을 맡으면서 아무래도 동네 일이다 보니까 챙겨야 할 것 같은 마음에 처음 해창 매구를 찾았으나 애초에 매구를 할 생각은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나 한 번 북채를 잡고 나니 북이 내는 웅장한 소리에 중독이라도 된 것처럼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며 “북 뿐 아니라 꽹과리와 장구, 징과 소고가 어울려 빚어내는 우리가락이 가진 신명은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을 것”이라며 밝게 웃었다.

먹고 살기 바쁜데다 발품을 수없이 팔아야 하는 마을청년회 일도 만만찮기는 마찬가지여서 그냥 마을 어르신들에게 인사나 드리겠다는 심정으로 회관을 빌려 쓰는 연습실을 찾았다가 그만 코가 꿰었다는 설명이다.

해창 매구에 한 번 빠진 그는 아예 마을청년회 후배 대부분을 매구의 세계로 끌어 들였다. 일종의 직위를 이용해 권력을 남용한 셈인데 그의 강권에 못 이겨 매구의 세계로 들어선 후배들도 우리가락의 강한 중독성에 그만 빠지고 말았다.

철건 씨는 “잊혀져가고 사라져가는 우리 마을의 가락을 젊은 청년들이 나서서 지켜야 한다는데 후배들이 뜻을 같이 해주고 누구보다 열심히 배우고 있어 감사한 마음”이라며 “좀 더 많은 회원들을 확보해 성대한 길놀음 중심이었던 원래의 해창 매구를 복원하고, 해창 매구를 세풍지역 주민들은 물론 광양시민 모두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게 꿈”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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