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욱 없었다면 그의 시 영원히 빛 볼 수 없었을 것

지난 2월 16일은 일제 말기를 대표하는 민족저항시인 윤동주(1917년~1945년)가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 지 70년이 되는 날이다.

28세이던 1945년 2월 16일 오전. 그러니까 해방을 불과 6개월 남긴 채 통한의 삶을 마감하고 현재 유해는 용정(중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동산교회 묘지에 묻혀 있다.

윤동주가 숨을 거두는 순간 크게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는 형무소 간수의 증언이 전해져 온다.

▲ 윤동주가 옥사한 후쿠오카 형무소 전경
윤동주는 지난 1943년 7월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경찰에 송몽규와 함께 검거돼 각각 2년과 3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됐다.

수감 후 일본의 간악한 생체 실험의 대상이 돼버린 윤동주는 1년 반 뒤인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독립의 한을 품고 원통하게 27세 2개월의 생을 마감했다.

그때 시신을 수습하러 간 윤동주의 아버지와 당숙은 피골이 상접한 송몽규를 면회했는데, 송몽규는 자신들이 이름 모를 주사를 강제로 맞고 있으며, 그 주사 때문에 동주가 죽었고 자신의 몸도 이 꼴이라고 증언한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송몽규도 윤동주가 숨을 거둔 한 달 뒤 숨을 거두고 말았다.

시인 윤동주를 연구하고 있는 신윤식 사진작가는 “윤동주가 구금된 후에 교토 경찰서에서 오랫동안 고초를 겪었던 것은 틀림없는 일”이라며 “그것은 취조의 양상이 다른 독립 운동가들에게 가해졌던 것과 똑같이 혹독하고 끈질긴 것이었다는 것도 몇몇 방문자들의 증언을 통해서 확인된 바 있었다”고 말했다.

‘윤동주’ 광양에서 부활하다

시인 윤동주는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그의 육필 원고가 보관됐던 진월 망덕에 정병욱 가옥이 있는 광양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연이 깊은 인연을 갖고 있다.

윤동주는 1935년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교에 편입했으나 1936년 숭실중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 당하자 용정으로 돌아가 광명학원 4학년에 편입한다.

이후 193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한 윤동주는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민족주의 사상과 독립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최현배 선생의 영향을 받아 사상의 틀과 시인으로써의 자기 정체성을 확고히 세우게 된다.

또한 이곳에서 만난 정병욱과는 기숙사와 하숙 생활을 함께 하는 등 각별한 사이로 지냈다.

▲ 연희전문학교 시절의 윤동주(좌)와 정병욱(우)
윤동주는 1941년 졸업기념으로 19편의 시를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라는 제목으로 시집을 출간하려 했지만 은사의 만류로 출판을 포기하고, 대신 자필시집 3부를 만들어 은사인 이양하 교수와 후배 정병욱에게 주고 나머지 한 부는 자신이 보관했다.

이후 1942년 도쿄에 있는 릿쿄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1학기를 마치고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편입했으나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되고 만다.

그러나 이때 정병욱에게 주었던 필사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발표되면서 윤동주의 주옥 같은 시가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정병욱은 윤동주로부터 받은 필사본 시집 1권을 보관하던 중, 1944년 1월 학도병으로 끌려가면서 그의 어머니께 시집을 잘 보관해 달라며 맡기게 된다.

그의 어머니는 윤동주의 유고를 항아리에 담아 마룻바닥 아래에 묻어두었고, 마침내 1945년 광복과 함께 가까스로 전쟁터의 사경을 벗어나 진월로 돌아온 정병욱은 어머니가 지킨 윤동주의 유고를 다시 찾아 1948년 1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간행함으로써 비로소 윤동주 시인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이처럼 윤동주의 시가 세상에 빛을 볼 수 있도록 결정적 역할을 한 정병욱의 어머니가 유고를 보관한 곳이 바로 망덕에 있는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이다.

현재 이곳은 1925년 건립된 전형적인 근대 상가 주택으로 지난 2007년 등록문화재 제341호 지정받아 보존되고 있다.

▲ 지난 2011년 8월, 오빠 윤동주의 흔적을 찾아 호주에서 망덕으로 날아온 여동생 윤혜원과 남편 오형범, 장남 오철주.

국내외 추모 행사 잇따라 그러나 광양에선 관심 밖

학계와 문학가들은 정병욱이 없었다면 윤동주의 시는 영원히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 졸업 당시 썼던 세권의 시집 중 유일하게 광양시 진월면 망덕마을의 정병욱이 보관했던 시집만이 세상에 알려졌고, 은사였던 이양하 교수와 윤동주 자신이 보관했던 시집 두 권은 74년이 지난 아직까지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는 △서시 △별 헤는 밤 △또 다른 고향 등 수십 편의 시가 실려 있었고 지금도 대한민국 국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손꼽히고 있다.

또한 그의 고향인 중국 용정과 유학 중 체포돼 생을 달리한 일본, 재미 한인들까지 그를 기억하고 추억하는 추모행사를 이어오고 있다.

▲ 1941년 11월 21일에 쓴 윤동주 대표작‘서시’
일본에서는 윤동주 서거 70주년을 맞아 일본 후쿠오카시 후쿠오카 구치소 앞에서 추도행사를 개최했고, 교토시 도시샤대 교정에 설치된 윤동주 시인의 시비 앞에서도 추모행사를 개최해 고인은 기렸다. 더불어 윤동주의 유품과 원고를 볼 수 있는 전시회가 후쿠오카, 교토, 도쿄 등 3개 도시에서 열렸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윤동주의 시를 노래로 만들어 부르는 재미 한인 청년 밴드 ‘눈오는 지도’가 서거 70주년 기념 공연을 펼쳤다.

또한 중국 연변 조선족자치주에서 활동하는 조선족 문인들도 윤동주 서거 70주년 겸 탄신 97주년 행사를 개최했다.

연세대 윤동주기념사업회에서도 추모식과 시·산문 창작대회 시상식, 추모 공연을 진행했다.

그러나 정작 윤동주의 시가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하고, 윤동주라는 시인을 세상에 알리게 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역사적 사연을 가진 광양에서는 기념행사는 커녕, 그의 서거일 조차 기억하지 못해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한편 신윤식 사진작가는 오는 2017년 12월 30일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개인 사비를 털어 ‘윤동주 세상 밖으로’라는 제목의 400페이지 분량의 화보집 출판을 준비하고 있다.

화보집 ‘윤동주 세상 밖으로’에는 신 작가가 중국과 일본, 한국의 현지 유적지를 직접 돌며 촬영한 사진들을 담아, 윤동주 생애의 역사와 시를 조명할 예정이다.

▲ 윤혜원이 오빠 윤동주에게 생애 마지막 남긴 글. 그녀는 이 글을 남기고 그 해 12월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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