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명 진 광양한의원 원장

어느 어부가 전어를 잡아 한가득 싣고 돌아왔다. 돌아와 보니 한가득 들어 있던 전어들 중 반쯤은 죽어 있었다. 며칠 후 어부는 또 전어를 잡아 싣고 돌아왔다. 이번에는 운 좋게 문어가 한 마리 잡혀 문어와 전어들이 한 어항에 들어가게 되었다. 어부는 문어 때문에 더 많은 전어가 죽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돌아와 보니 놀랍게도 한 마리의 전어도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

이 두 이야기가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이 있다. 건강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긴장이나 스트레스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문어와 함께 있던 전어들은 문어 때문에 계속 긴장과 스트레스 속에 있어야 했을 것이고 그 상황이 오히려 전어들에게 생명에 대한 의지를 키워준 셈이다.

한국인에게 유독 스트레스가 많다. ‘행복지수’가 다른 나라사람들과 비교해 거의 꼴찌 수준이다. 직장에서는 보수나 승진 상사와의 관계 때문에 겪는 스트레스, 학교에서는 좋은 대학을 가기위해 어쩔 수 없이 친구를 이겨야만 하는 상황, 명절만 되면 나타나는 주부들의 ‘명절증후군’ 등, 경쟁하지 않을 수 없는 사회구도와 불합리한 권위에도 순종을 강요하는 한국 특유의 문화에서 비롯되는 탓일 게다. 계층, 이념, 지역, 세대 간의 갈등 등 사회문제가 야기하는 스트레스도 만만찮다.

사회문제를 개인의 스트레스로 연계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스트레스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 가이다. 보수가 작다고, 지위가 낮다고, 성적이 좋지 않다고, 왜 나는 이런 가정에 시집을 왔느냐고 탓만 해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자신이 겪고 있는 스트레스를 파악해 보고 극복할 수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만일 극복할 수 없는 것이라면 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극복할 수 있는 것이라면 기꺼이 안아야 한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스트레스를 근력운동에 비유해 보자. 무게가 지나치게 가벼우면 근력을 키울 수 없다. 근육을 키우기 위해선 힘들더라도 무거운 기구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근육에 스트레스가 가해지지 않으면 근육의 발달도 없기 때문이다. 일상생활도 마찬가지다. 발전을 위해서는 일정정도 스트레스가 필요하다. 일정정도의 스트레스는 잘 받아들이기만 하면 긍정적 에너지가 된다. 마음가짐에 따라서 스트레스도 고마운 친구가 되는 것이다.

사실 위의 전어 이야기에서 음미해야할 점이 있다. 처음의 전어들에게도 스트레스가 있었다. 넓은 바다에서 마음껏 주유하다 좁은 공간에 갇히면서 감내하기 힘든 스트레스가 따랐을 것이다. 스트레스는 절망으로 절망이 죽음으로 이어진 것이다. 두 번째의 전어들에겐 좁은 공간은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그들은 문제는 문어의 위협이었다. 문어로부터 생명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스트레스를 이겨낸 것이다. 같은 배경이라도 조건에 따라서 스트레스가 될 수도 있고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스트레스를 자기 삶의 원동력으로 활용할 것이냐, 아니면 스트레스에 함몰돼 버리느냐 하는 것은 순전히 자신의 의지에 달렸다고 볼 수 있다.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각자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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