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늬의 풀잎에 드는 햇살

대 여섯 살 무렵의 일이다. 고종 사촌 선옥(가명)은 나보다 두 살 아래 여자아이다. 어렸을 적 선옥이는 무척 시샘이 많았다. 나보다 예쁘면서도 시샘 때문에 뭐든 내가 하는 대로 따라 해야만 성이 차는 아이였다. 내가 머리를 풀고 다니면 저도 풀고, 내가 땋으면 저도 땋아달라 조르고 내가 바지를 입고 있으면 치마를 입고 나오다가도 얼른 들어가서 바지로 갈아입고 나오곤 하였다. 한 번은 할머니랑 공중 목욕탕에 간 적이 있다. 할머니는 차례로 우리 때를 밀어주시며 “우리 하늬는 맴씨가 고응께 때도 허연디 이 작것은 맴씨가 시커먼께 때도 시커머쿠마잉” 하고는 선옥이 등을 찰싹 올려 부치셨다. “할매는 와 맨날 나만 갖꼬 그랬싼다요” “긍께 맴씨를 곱게 써봐, 이것아. 뭐라고 안할팅게” 징징대는 선옥을 보며 순진한 나는 마음을 다지곤 했다. ‘참말로 맴을 곱게 써야 것는디. 맴 한번 잘못 썼다가 갑자기 때가 시커멓게 나오믄 할매가 겁나게 실망헐팅게……’

그랬던 선옥이 미국 일주 여행을 왔다며 연락이 왔다. 결혼한 후 십 여년만의 만남이었다. 그 아이가 온다는 소식에 들떠서 집 안 대청소도 하고 장도 잔뜩 봐서 기다렸다. 훤칠한 남편을 거느리고 위풍당당 나타난 선옥이는 한 눈에 봐도 고가의 물건들로 휘감고 있었다. 그러한 선옥이 들어서면서부터 눈을 번뜩였다. 언니, 이 그릇은 어디서 샀수? 이 그림은 얼마짜리우? 언니 보톡스 맞은 거 아니우? 이런 집은 얼마면 살 수 있수? 루이비똥이니 샤넬이니(또 무슨무슨 브랜드를 들먹였는데 내가 모르는 거라 기억을 못하겠다) 명품백들 있음 다 내놔 보시우. 그 아이 눈에는 내가 갖고 있는 건 다 명품이고 고가이고 자기가 갖고 있는 건 뭐가 됐든 브랜드나 가격을 막론하고 다 별 볼 일 없는 것들이라고 폄하했다. 사실 여지껏 난 명품이란걸 모르고 산다. 명품을 내 몸에 휘둘러서 내가 명품이 되는 것도 아니고 내 정신이 고양되는 것도 아니고 거기에 가치를 두지 않기에 주눅들어 본 적도 남을 부러워 해 본 적도 없다.

부러워하기는 커녕 천편일률적인 디자인과 브랜드 고유의 문양이 박힌 가방을 너나할 것 없이 매고 다니는게 몰개성해 보여서 되려 피하는 편일 정도다. 그러한 내가 굳이 사치라는 이름의 한 가지 기준이 있다면 구색을 갖추는 일이다. 색의 구색, 질감의 구색, 때와 장소에 맞는 구색 말이다. 제 아무리 값비싼 옷을 거저 준대도 구색이 갖춰지지 않거나 단순하고 깔끔한 내 취향이 아니면 거절한다. 각설하고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르니 그 아이가 명품을 좋아한들 나무랄 일은 아니다. 그 아이 역시 내가 내 수입의 십 분의 일을 책을 사는데 쓰는 걸 전혀 이해하지 못하니 마찬가지 아닌가. 얼마전 뭉크의 ‘절규’라는 그림이 소더비 경매장에서 1억2천만원에 팔렸다. 20세기 최고의 걸작품으로 꼽히는 그 작품! 돈이 많다고 다 그렇게 비싼 그림을 곁에 두지는 않을 것이다.

각자의 취향 가치관 입장에 따라서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는 선택적 사항이니 만큼 거기에 딴지 걸 생각은 없다. 하지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면 늘 사촌 동생은 끊임없이 자신을 누군가와 비교하며 불행해 하기도 하고 행복해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분수에 넘치게 장만해서 무리하게 곁에 두고 또 이내 싫증을 내고 좀 더 비싼 것 좀 더 새로운 것을 탐하는 것은 비교의 맘에서 비롯 되었다. 남의 삶과 내 삶을 비교 했을 때 불행은 시작된다. 나만의 멋 나만의 개성에서 가치를 찾지 못하는 비교되는 삶은 끝없이 불안하고 긴장되고 우울해지기 쉽다. 난 사촌동생의 불안정한 탐색전을 가만 지켜보다 그 아이의 허를 찔러 불현듯 행복을 일깨워 주고 싶었다. 뭐든 비교해서 우위에 있으면 안심하는 아이이기에 곧 비교에 들어 갔다. 애 강남의 너네 집값이면 우리 집 같은 거 두 세채는 살 수 있어. 내 핸드백은 50불 짜리야. 이 신발도 45불 줬을걸. 저 그림들 갖고 싶으면 갖고 가. 다 모조품이야. 보톡스? 아직 구경도 못해 봤다. 그래도 다 나랑 바꿀래? 내 말에 그 아이는 천지가 흩어지게 웃으며 표나게 행복해 하더니 그런데 언닌 왜 그리 비싸 보이우? 그 비결이 뭐유? 하고 끝내 특유의 질투심으로 대미를 장식했다. 짜식! 내가 비싼 게 아니라구, 내가 명품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네 질투, 네 비교가 그렇게 보이게 하는 거라구! 그건 그러니까 내 비결이 아니고 너의 비결이지! 애야. 바로 질투는 너의 힘 되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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