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이 깃든 봉강] 10. 아름다운 느티나무 세 그루가 반기는 덕촌 마을
양선례 광양문화연구회장
역사적인 대선이 있는 지난 6월 3일 ‘분홍 낮달맞이꽃’이 만발한 봉강면 행정복지센터를 찾았다. 여름 꽃 금계국와 개망초도 봉오리를 맺고 있다. 드문드문 투표소를 찾는 사람들의 표정이 비장해 보였다.
정 선생님이 투표를 마치고 나오자, 함께 덕촌 마을로 향했다. 그는 필자가 광양서초등학교에서 6학년 담임을 하던 시절, 동학년 교사로 만났다. 덕촌 마을은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으로, 지금도 아버지가 물려주신 선산과 밭이 있다. 광양 지역에서만 25년, 모교인 봉강북초등학교에서도 2년 반을 근무했다. 사는 곳은 순천이지만 한 달에 한두 번은 마을 회관에 들러 어르신들이 잘 지내는지 살피는 일도 잊지 않기에 마을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길잡이 역할로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덕촌 마을은 덕촌(영촌)과 덕평 마을이 합해진 이름
덕촌 마을은 광양시 봉강면 조령리(법정리)에 속한다. 봉강면에는 7개의 법정리가 있는데 덕촌과 부암, 하조마을이 조령리에 속한다. 또 덕평(바깥 동네라고 부름)과 덕촌(안 동네, 혹은 도치재 마을이라고 부름), 두 개의 자연부락을 합해 덕촌이라 부른다. 두 마을이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왼쪽과 오른쪽으로 갈라져 있다.
광양읍에서 백운산 성불 계곡이 있는 지방도를 따라 오르다 보면 옛 봉강북초등학교가 나온다. 지금은 <봉강 햇살촌>이 된 그곳의 바로 앞 마을이 덕평(德坪)이고, 오른쪽 좁은 길을 따라 2, 3백m 들어가면 있는 마을이 덕촌(德村, 영촌이라고도 함)이다. 한자에서 알 수 있듯이 덕평 앞뜰은 꽤 넓다. 몇 년 전부터 마을의 평지 일부를 개간해 ‘해랑 마을’이 들어섰다. 새로 지은 세련된 디자인의 건물은 덕촌에서 오래 터 잡고 살아온 집과 외관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거리상으로는 덕촌에 가깝지만 해랑 마을은 행정구역상으로는 개룡 마을에 속한다.
200년 넘은 느티나무 보호수가 세 그루 있는 덕촌 마을
덕촌 마을을 먼저 찾았다. 앞도, 옆도, 뒤도 모두 산이다. 마을 입구에 커다란 느티나무 세 그루가 먼저 맞이한다. 1982년 보호수로 지정 당시 두 그루는 수령이 약 200년이고, 나머지 하나는 220년이라고 <광양시지>에는 기록돼 있다. 그런데 높이가 17m, 나무 둘레가 6m가 넘는 제일 큰 나무(조령리 208-1번지) 표지판에는 1982년 지정 당시 450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어떤 게 맞는지 의문이다. 그 나무 아래 사방이 투명창으로 된 팔각지붕의 정자도 있지만 모심기에 바쁜 6월 초순에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없었다. 한나절 땀 흘려 일하고 잠시 이곳에 서기만 해도 에어컨 못지않은 바람이 불 것처럼 나무는 크고 우람했다. 정자나무만 봐도 마을의 역사가 짐작되었다.
바로 옆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더없이 맑은 깨끗한 개울물이 흘렀다. 정 선생님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지금 봉강 저수지 위로는 붕어가 살지 않아요. 아마 계곡이 바위, 자갈로 되어 있고, 붕어가 좋아하는 뻘이 없어서 그런 것 같아요. 그만큼 계곡물이 깨끗하다는 뜻이죠.” 한때 민물낚시를 취미로 즐기던 그였기에 영 근거가 없는 이야기는 아니리라.
이야기는 이어진다. “제가 광양중학교 다닐 때 전교생이 420명이었어요. 5월 말부터 보리 베기, 모내기 ‘노력 동원’을 나가요. 일을 하고 나면 땀이 비 오듯 흘러서 끝나고 나면 광양읍 동쪽(현재 창덕에버빌 아파트 옆 동천을 말함)으로 흐르는 개울물에 너도나도 뛰어들어요. 친구들이 ‘아, 물 좋다!’ 감탄하면서 목욕하는데 나는 손조차 담근 적이 없어요. 우리 동네 개울에 비해 그곳은 너무 더럽게 느껴졌거든요. 약간 흐리기만 했지 별다른 오염원이 없던 그 시절에는 동천도 깨끗했을 것인데 제 눈에는 그리 보인 거죠.”
깨끗하고 맑은 계곡물은 마을의 자랑
그가 중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내동 마을(봉강룡 계룡산장 입구, 굴 바위를 기준으로 그 위쪽 마을을 내동이라 칭함) 위쪽으로는 우물이 없었다. 냇가 물을 길어다가 밥을 짓고, 빨래와 청소를 했다. 70년대 초가 되자, 집집마다 우물을 파는 게 유행처럼 번졌다. 공동 우물터가 가까이 있는 동네만 그 우물을 이용했고, 나머지는 냇가 물을 식수와 생활용수로 사용했다. 작은 도랑에 식수 전용 우물이 따로 있었단다.
‘嶺村敬老堂(영촌경로당)’이라는 한자 현판이 걸린 데를 지나 마을 안길로 접어들었다. 낮은 담장 너머로 붉은 보리수가 주렁주렁 달린 집이 나왔다. 몇 개를 따서 입 안에 넣고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막다른 길에 이르렀다. 포장된 길은 여기까지였다. 이번에는 차 한 대가 겨우 갈 만한 오른쪽으로 난 좁은 산길로 향했다. 이 길은 옥룡면 추산리까지 이어진다. 겨울이면 그 골짝의 바람이 어찌나 센지 집안에 놓아둔 도끼가 고갯길 꼭대기까지 날아간 적이 있어 이 고개를 도치(도끼)재라 불렀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리고 ‘덕을 숭상하는 모범적인 마을’을 나타내려는 의도에서 발음이 비슷한 ‘덕촌’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광양시지>에 기록돼 있다.
추산리로 향하는 좁은 길을 따라 더 오르니, 오른쪽에 작은 저수지가 나왔다. 수풀이 우거져서 일부러 말해 주지 않으면 존재조차 몰랐을 것이다. 가까이 가서 사진도 찍고, 가재가 사는지도 살피고 싶었으나 잡목이 우거져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저수지 앞에 앵두과 구지뽕이 붉은 열매를 달고 있는 작은 농장이 있었다.
올해 들어 처음 보는 앵두라서 반가웠다. 꾸지뽕(오디)도 몇 개 따서 입에 넣었지만 그리 달지는 않았다. 재래종이 아니라 개량종이라서 맛이 없단다. 닭과 염소도 보이고, 이미 세어 버린 취나물과 고사리도 지천이었다. 매일 사람이 와서 관리하는지 여러 작물이 심겨져 있었지만 농장 주변은 잘 정돈돼 있었다. 사람이 가까이 가자, 여러 마리의 개가 한꺼번에 짖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조차 힘들었다.
때마침 트럭 한 대가 올라왔다. 농장 주인인 서판석(71세) 씨였다. 찾아온 취지를 설명하고 언제부터 저수지가 있었는지 물었다. 자신의 땅 일부도 밀가루 몇 포대 받고 저수지에 흡수되었단다. “내가 열서너 살 먹었을 때 처음에 저수지를 만들었는데, 막다가 터져버렸어. 몇 년 지나서 다시 만들었지. 나도 일꾼으로 참여했는데 아이들은 어른의 반품 삯밖에 못 받았어. 아마 내가 열대여섯 되었나 봐. 그때 지게질을 많이 해서 등에 혹이 이만큼 올라와서 엄청 고생했어” 그의 말에 따르면 저수지는 아마도 1970년대 초반경에 만들어진 모양이다.
중장비가 없던 시절이라 손으로, 지게로, 괭이를 이용해 순전히 마을 사람들의 힘으로 저수지를 만들었다고 옆에 있던 정 선생님이 거들었다. 그런데 전국 시군구 저수지 현황을 보면 봉강면에는 모두 네 개의 저수지가 있다. 조령리의 조령제(1945년 준공)와 봉당리 봉계제(1944년 준공), 부저리 부현제(1943년 준공), 석사리 석사제(1943년 준공)가 그것으로 모두 1940년대에 만들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 선생님 이야기와도 일치하는 걸 보면 기억의 오류라기보다는 터진 걸 다시 쌓아서 막는 과정이 반복되지 않았나 싶다.
저수지 위, 지반이 내려앉아 흉물이 된 양송이 공장
서판석 씨는 저수지 위, 산 중턱에 있는 건물을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비닐하우스 모양의 건물 네 동은 양송이 공장이고, 옆에 붙은 파란색 지붕 두 동은 관리동으로 보였다. 건너편 산 중턱이지만 별도의 진입로가 개설돼 있다고 했다. 지금도 운영 중인가 싶어 물었더니 아니란다. 한쪽이 푹 꺼져있는데 그것도 안 보이냐는 지청구를 들었다.
10여 년 전에 광양읍 사람인 정 씨가 정부지원금을 50억 가까이 받아서 지었단다. 한때는 사람들을 모아 놓고 영농 교육을 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지반이 1~2m가량 내려앉아서 방치되어 있다. 설명을 듣고 자세히 보니 한쪽이 기울어진 상태였다.
“저거 허가 내준 놈은 벌을 받아야 해요. 정부 돈은 ‘앞에 본 놈이 임자’라더니 딱 저 건물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동생이 중마동에서 법무사로 있고, 시장 선거일 때 참모로 뛰기도 해서 그 덕에 따냈는지는 몰라도 토목을 한다는 공무원이 저렇게 높게 토사를 쌓으면 주저앉는다는 걸 진짜 몰랐을까요? 네댓 명이 법인체를 만들어서 그 돈을 타냈나 본데, 나랏돈 50억이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소. 몇 년 해 먹지도 못했어요. 아무리 내 돈 아니라도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오? 이런 내용을 신문에 꼭 올려서 보도하시오” 힘도 없는 필자라서 인터뷰하면서도 미안했다.
산꼭대기에 송전탑이 여러 개 보였다. 광양제철소가 있는 쪽에서 넘어오는 것인데 주민의 반대에 부딪혀 옥룡과 봉강의 백운산 능성이를 타고 이어진다. 동네를 지나지 못하고 산으로 산으로만 연결된 것이다. 다행이라면 송전탑에서 700m까지는 한 가구당 매월 3만원씩 전기세를 지원해 준단다. 송전탑과의 거리를 조사하고 보니 다른 가구는 다 해당이 되는데 한 가구만 702m라서 지원 대상에서 빠졌다. 동네 전체가 다 혜택을 보는데 한 집만 그러면 되겠냐고 어거지를 써서 목적을 이루었던 일을 들려준다. 입담이 좋은 분이다.
덕평 마을로 건너왔다. 옛 봉강북초등학교 바로 옆에는 제재소가 있었다. 큰 나무가 화물차에 실려 수시로 오갔다.
“전기는 제가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들어왔어요. 학교에서 숙제라도 내주면 종제기 불을 켜 두고 미술 숙제를 했어요. 불이 어두워서 노란색인지 파란색인지 구별이 안 됐어요” 전기 없는 세상이라니. 호랑이 담배 피던 이야기처럼 까마득한데 정 선생님의 기억력은 총총하기만 하다.
옛 봉강북초등학교 자리, 봉강 햇살 수련원으로 거듭나
봉강북초등학교는 1939년 <조령간이학교>로 개설되었다가 1946년에 <봉강북국민학교>로 분리되었다. 1994년 3월 1일 <봉강초등학교 조령분교장>으로 격하되었다가 그해 9월 1일 봉강초등학교에 통폐합되었다. 이후 광양교육청 소속 <봉강 학생의 집>으로 변신해 학생 수련원으로 이용되다가 2008년부터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거쳐 숙박과 체험, 식당과 전시실, 수영장을 갖춘 <봉강 햇살 수련원>으로 거듭났다.
사무실에 근무하는 직원은 단 한 명, 바로 박소영 씨이다. 광양읍에 사는 그는 <봉강권역 영농조합 법인>이 운영하는 이곳에 2년째 근무 중이다. 마당에는 물놀이장이 만들어져서 숙박객이나 관광객이 이용할 수 있지만 우리가 간 날은 아직 개장하기 전이었다. 평상 26개가 있는데 하루에 7만원의 임대료를 받고 빌려준다. 수영장 주변에 지붕이 있는 평상이 있어서 아이들이 물놀이하는 걸 볼 수 있는 게 장점이다. 숙박은 4인실 기준 평균 10만원이라고 하니, 봉강 계곡을 찾는 분들이 이용해 봄 직하다.
도자기와 꽃차 체험으로 인기 끄는 <수미도예꽃차>
마당 한쪽에는 <수미도예꽃차>라는 이름표를 단 공방이 있었다. 정희숙(59세) 님이 주인장이다. 그녀는 호주에서 2년간 공부하고 와서 광양시 영어타운에서 30년간 영어를 가르치다가 퇴직했다. 수련원에서 하는 도예와 꽃차 체험 수업을 전담한다. 도예를 20년이나 해왔지만 더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싶어서 전남도립대학 도예과에 진학했다. 아들딸 뻘인 학생들과 공부하는 게 재미있다는 그녀는 2학년에 재학 중이다. 꽃차 배운 지도 10년째다. 하동 ‘대렴차문화원’에서 녹차 만드는 법을 배웠으며 지금은 꽃차 협회 이사도 맡고 있다. 2023년에는 ‘하동 차 세계 엑스포’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휴일이라 그녀의 남편 황식연(65세)도 옆에 있었는데, 아내 자랑에 여념이 없었다. 끊임없이 도전하는 아내와 그 곁을 든든하게 지키는 남편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정 선생님은 봉강북교 16회 졸업생이다. 교문 입구에 정 선생님이 초등학교 다닐 때도 있었던 독서상이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학교에서는 책 읽는 걸 강조하는데 학생의 독서력은 줄어들고 있으니, 아쉽기만 하다. 책이 유튜브나 인스타 숏폼만큼 재미있으면 읽지 말라고 해도 찾아 읽을 텐데 말이다. “그때는 보자기가 책가방 대신이었어. 등교하면 그 보자기를 들고 냇가에 가서 모래와 자갈을 퍼 와야 했어요. 줄지어 냇가에 가서 어깨에 메고, 머리에 이고 왔죠. 그러면 교문 입구에 서 있던 소사(지금의 시설 관리 주무관) 아저씨가 도장을 찍어 줬어. 하루에 열 번쯤을 그렇게 날랐던 것 같아요. 그렇게 해서 교실을 지었는데 폐교되면서 다 허물어졌죠.”
소나무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
운동장 서쪽에 있는 소나무 이야기도 빠뜨리지 않았다. “내가 듣기로는 개교 당시 1회 선배들이 산에 있는 나무를 캐와서 심었다고 해요. 10년이 지나도 그 크기가 변함이 없지요. 한때 학교가 폐교되자, 이 나무를 팔자는 말이 오갔어요. 1억을 주고 산다는 사람도 나타났고, 헬기로 운반하자는 이야기까지 되었는데 학부모의 반대가 심해서 결국 못 팔았어요. 태풍으로 가지 한쪽이 찢어져서 잘라냈어요.” 예전 사진과 비교해 보니 키는 조금 더 컸지만 40년 전보다 풍성한 건 덜했다.
마을을 가로질러 봉강 계곡에 가보았다. 맑은 물이 신록과 어우러져 풍경화를 보는 듯했다. 신촌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과 성불사 계곡에서 흐르는 물이 와이(Y) 자 형태로 만나는 양합소 지역이라 물살이 셌다. 오래전 큰비가 왔을 때 집채만한 바위가 굴러와서 마을 앞 초가집이 쓸려 내려간 적도 있다고 했다. 이후 양식장을 만들기도 했으나 다시 생긴 물난리에 한동안 황무지처럼 방치되었다가 새로 만든 동네가 바로 해랑 마을이다.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동네, 덕촌 마을을 탐방했다. 정 선생님의 안내로 이곳저곳을 둘러봤지만 정작 본인은 아무런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다며 사진 한 장 찍자는 필자의 청을 극구 사양했다. 아쉽다. 낯선 동네였던 그곳이 내가 나고 자란 마을처럼 정답게 느껴지는 게 바로 마을을 조사하면서 얻는 기쁨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