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이 깃든 봉강] 12. 쌍의사(雙義祠)에 가면 진주성이 보인다.
김세광 광양문화연구회원
임진왜란의 전개
우리는 역사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 시대마다 일어난 사건과 이야기들을 통해 앞으로 살아가야 할 방향을 정하고 새로운 삶의 지혜를 얻는다. 그런 점에서 지난 역사를 들여다보는 것은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큰 사건이었던 임진왜란(1592), 정유재란(1597)은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큰 피해를 입혔다. 전국 각지에 많은 가옥과 귀중한 문화재들이 불타고 희생된 사람들과 물적인 피해가 극심했다. 그 당시 조정은 과거 200년 동안 전쟁을 겪지 않았던 탓인지 당파 간의 정쟁에만 빠져있었을 뿐 나라를 지키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율곡 이이 선생이 10만 양병설을 주장하며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국방 강화 정책이 제시되기도 했으나 실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나라를 통일하고 국민을 대통합시키기 위해 ‘대륙 정복’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조선과 힘을 합쳐 명을 치자는 제안을 했지만 선조는 거절했다. 그러나 일본은 집요하게 과거 전쟁을 통해 연마한 병법, 신무기인 조총을 대량 생산하며 전쟁을 준비했고 1592년 4월 13일 오후 5시 20여 만의 병력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다. 임진왜란은 그렇게 일어났다.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의 공격에 우리 군은 순식간에 무너졌고 왜군은 부산을 함락시킨 후 20여일 만에 한양까지 진격했고 6월에는 평양을 내주었다. 그러던 왜군은 행주산성 싸움에서 권율 장군에게 크게 패한 후 위세가 꺾이며 1593년 4월부터는 한양을 철수해 남하하기 시작했고 6월에는 진주 부근에 머무르게 되자 진주성을 지키던 장수들은 10만이 넘는 왜군이 밀어닥치자 많은 숫자가 뿔뿔이 흩어졌다. 당시 진주는 식량과 각종 군수품의 보급기지였고 호남과 가까운 곳이며 진주가 뚫린다면 호남이 무너질 것이다며 반드시 진주성을 지켜야 한다는 결의를 다졌다. 그러나 많은 아군의 장군들이 적의 사지에 군사들을 보낼 수 없다며 흩어졌고 나주 의병장 김천일, 최경희 화순 의병장 황진 충청 병사 등은 끝까지 진주성을 지키기를 맹세했다. 이러한 위급한 상황을 전해들은 광양의 강희보, 강희열은 휘하 장수들을 이끌고 김천일 장군의 지휘 아래 들어가 싸우다 1593년 6월 27일(강희보 전사)과 29일(강희열 전사) 각각 장렬히 전사했다. 진주성 전투에서 입은 아군의 인적 물적인 피해가 엄청났지만 왜군들 역시 큰 병력손실을 입었고 결국 일본으로 퇴진하게 되었다. 의병들이 왜군에 맞서 완강히 싸운 덕분에 호남의 곡창지대를 지킬 수 있었고 왜군들을 몰아낼 수 있었던 것은 용감한 의병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진정한 영웅들
동생 강희열이 무과에 급제한 것에 자극을 받은 유생 강희보는 문과를 준비하고 있었다. 진주성 전투 소식을 듣자 흰옷을 입고 장정 백여 명을 불러 모았다(白衣倡義). 당시 석주관 조방장으로 남원 가는 길목을 방어하고 있던 강희열은 군사 백여명과 함께 진주성에 입성해 있었다. 두 형제는 먼저 단성으로 달려가 왜군과 싸우던 백부 강인상을 지원했고 다시 창의사 김천일 휘하로 들어온 장수들이었다.
강희열의 뒤에는 사촌동생 강희원이 표(彪) 자 장표가 쓰인 깃발을 들고 서 있었다.
강희원은 숙부 강천상이 자신의 아버지 강인상보다 더 대단하다고 여겼다. 숙부 자신은 의연곡을 모으면서 장남과 차남 모두를 전장에 보냈기 때문이었다.
형제들 중에서 유일하게 무과에 급제한 강희열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가 놓았다. 무슨 일이있을 때마다 성미가 급해서 바로 행동으로 옯기곤 했던 그였다. 고경명이 금산에서 호남 각 고을에 편지를 띄웠을 때도 바로 의병군을 데리고 올라갔다가 전투가 벌써 끝난 것을 알고 광양으로 내려와 통곡했으며, 석주관 조방장으로 부임해서도 숙부가 단성에서 고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군사 백여 명을 거느리고 지리산을 넘어 달려갔던 것이다. 고경명의 아들 고종후는 강희열이 아버지 고경명을 도우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오랜 지기처럼 그를 좋아하고 신뢰했다.
촉석루에서 비빔밥을 먹고 진지로 나갔던 민여운이 시신으로 수습되어 업혀 왔다. 민여운의 시신은 참혹했다. 십여 군데나 창검을 맞은 채 왼손이 잘리고 오른손이 부러져 있었다. 강희열이 민여운의 시신을 보고서는 분기탱천하여 의병 몇십 명을 데리고 아수라장이 된 적진으로 돌진했다.
“죽일 놈덜!”
“창의사 나리, 놈덜이 미친 개맨치로 달라봍고 있십니더,”
김준민이 소리쳤다. 시신이 된 장수 가운데 왜군의 화살이 목을 관통한 채 꽂혀있는 사람도 있었다. 김천일이 탄식했다.(작가정신 출판, 정찬주의 ‘이순신의 7년’에서)
* 왜적이 성안에 투서하여 항복을 종용하는 심리전을 폈다. 그리고 구갑차(龜甲車) 위에 정병 수십 명을 싣고 성에 육박한 뒤 철추(鐵鎚)로써 성벽을 뚫기 시작하므로 황진이 나서서 기름 묻힌 섶에 불을 붙여 투하하여 구갑차를 불태웠다. 밤 8시경에 적이 북문을 향해 쳐들어왔으나 김해부사 이종인(李宗仁)과 그 부하들이 힘껏 싸워 물리쳤다. 이때 광양 출신 의병 강희보가 전사했다.(6월 27일)
* 오후 2시경 연일 장마로 성의 동문이 무너지자 적군이 개미 떼처럼 달려들었으나 이종인과 휘하 장병들이 육박전으로 이를 물리쳤다. 다시 서북문을 향해 적이 쳐들어오자 목사 서예원은 싸우지도 않고 도망치니 모든 군사들도 사기를 잃고 달아나게 되었다. 이리하여 촉석루 쪽으로 장령(將領)들이 후퇴하여 김천일, 최경희 등 십여장(十餘將)은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하고 강희열, 이종인 등 십여장은 적진에 돌격하여 장렬한 전사를 하였다. (6월 29일)
* 이렇게 진주성이 함락되어 군과 백성을 합한 사상자가 6만을 넘고 짐승들까지 살아남지 못했다. 그러나 왜군도 9일간의 전투에서 입은 막대한 병력손실과 전략상의 차질로 말미암아 마침내 철군하고 호남 침공을 못하고 말았다.’ (이상 光陽市誌에서)
용감한 의병가족
조용한 희생이 위대한 영웅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위험에 빠진 사람이나 상황을 외면하지 않고 맞서 싸우거나 몸을 던져 구원하는 숭고한 정신을 지닌 이들을 말한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국가를 위하거나 타인을 위해 나설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부산포에 진입했던 왜군이 한양으로 가까이 다가오자 무능한 임금과 조정 대신들은 볼썽사납게 의주로 피란을 떠나갔다. 그러나 애국심과 충정으로 뭉친 의병들은 끝까지 왜군에 맞서 싸웠지만 숫적 열세는 극복할 수 없었다. 그들은 죽음으로 나라를 지켰다. 국가의 권력이란 나라를 이끌고 지키는 책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이니 나라의 주인은 임금이 아니라 전장으로 향하는 의병들과 십시일반 의연금을 모은 민초들이었다. 민중들은 도망가는 선조 일행에 돌을 던지고, 대군들의 집에 불까지 지르는 등 큰 반감을 표출했다. 선조 임금과 조정 대신들의 볼썽 사나운 행위는 두고두고 비판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전장에서 사라진 의병들의 사후에 대한 예우도 평가도 활발하지 못하다. 이름도 자취도 없이 죽어간 그들에게 너무 소홀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행스럽게도 광양시에서는 강희보 강희열 형제의 사당을 건립하고 매년 그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있다. 누구보다 앞장서서 의병들을 불러 모으고 전투에서 용맹을 떨친 그들은 적군에게 넘어갈 수도 있었던 나라를 지킨 정신이야말로 광양사람으로서의 자랑스러운 역사이며 광양지역의 정체성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 쌍의사 가족의 계보를 살펴보면 국가를 지키는 일에 유난히 많은 공헌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진주 강씨의 시조인 강민첨 장군은 호는 은열공이며 고려 때 강감찬 장군과 함께 거란의 침입을 물리친 장군으로 잘 알려져 있다. 형제의병장의 13대조 할아버지(강근)은 역로(驛路)와 역마, 통행 등을 관리한 찰방이었다. 큰아버지 강인상은 무과에 급제한 의병장이었고 그들의 아버지 강천상은 순천부사를 지냈다. 아버지는 전장에는 직접 참전하지 않았지만 의병을 위한 지원금, 곡식을 모으며 의병을 열심히 도왔다. 강인상과 함께 전사했던 의병 강희국은 강인상의 조카로만 기록되어 있어 그의 가족관계가 분명치 않다. 그들 가족에서 의병이 무려 7명이나 나왔다. 그들은 진주성이 왜군의 손아귀에 넘어가자 주저하지 않고 달려나가 싸웠던 용맹스러운 전사였고 뜨거운 애국심으로 뭉친 가족임이 분명했다.
뒷날 조정에서는 희보, 희열 형제를 진주 창열사에 배향하였고, 영조 40년에 강희보에게는 형조좌랑(정6품), 강희열에게는 병조참의(정3품)가 추증됐다. 1970년에는 진주 강씨 문중과 광양의 유지들이 [강희보, 강희열 형제장군 숭모회]를 창립해 봉강면 신룡리에 묘소와 묘비를 보수하였고 사당을 건립했으며, ‘98년 동재’, 서재 삼문 등을 신축하고 사당과 관리사를 이축하여 규모를 갖추었다. 지금도 매년 음력 10월 3일이면 쌍의사에서 제례를 지내고 인근 강희열 부대 대원들이 참가한다. 참가한 사람들에게는 점심으로 비빔밥을 대접한다. 비빔밥은 진주성 전투에 참가했던 의병들이 주로 신속하고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전투 음식이라 의미가 있다.
쌍의사가 살았던 흔적
신촌마을에는 지금도 임진왜란 당시의 지명들이 나이 지극한 노인들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몰티골(강장군이 출정 후 3일 만에 말이 나왔다는 곳), 몰랑뜰(몰티골에서 나온 말이 슬피 울며 지나갔다는 뜰), 댓모탱이(대밭 모퉁이), 또랑남꼴(큰 골 북쪽에 있는 긴 골짜기), 띠밭골(질매재마을 동남쪽 골짜기) 등의 옛 지명들이 신비롭게 남아있다. 영웅이 태어나고 생활했던 역사의 현장은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살아있음을 느낀다. 사람의 기질이나 생각은 물려받은 유전인자의 영향도 있지만 나고 자란 환경의 영향도 크다. 지금껏 우리의 선대들은 주변의 산의 봉우리마다 이름을 붙여주며 자연과 합치된 삶을 살아왔고 이름에 걸맞게 세상의 일들이 원만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신촌마을이 들어선 위치를 찬찬히 살펴보면 공교롭게도 우측으로는 섬진강의 바람을 막아주는 백운산 형제봉이 나란히 솟아있고, 좌측으로는 봉황이 깃든다(큰 인물이 출현할 기운)는 비봉산이 둘러싸고 있다. 그 가운데로 황소의 등골처럼 탄탄한 바구산(바위산) 줄기가 내려와 언덕이 되어 마을을 감싸 안고 앞으로는 넓은 계곡이 서천을 향하고 있다. 좌우로 흘러내린 산맥이 마을을 든든하게 보호해 주는 형상이다. 풍수지리학에 대한 식견은 부족하지만 지형 자체가 혹시 형제의병장의 탄생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어린 시절부터 줄곧 바라보았던, 바라보며 꿈을 꾸었던 자연이 그들이 올곧은 인물로 커가는 데에 도움을 주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맺음말
형제의병장의 이야기는 단순한 역사적인 사건 자체만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대를 이어 살아가는 마을이나 주변 도시 사람들의 사고와 정신, 정체성에 영향을 미친다. 그들이 행한 일은 뿌리 깊은 나무처럼 깊고 단단하게 지역 속으로 스며든다. 쌍의사는 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위인을 모신 곳답게 분위기가 엄숙하다. 평소에는 좀처럼 출입하는 사람들을 만나기 어렵다. 그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면서 좀 더 대중에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쌍의사 사당을 찾는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다양한 전시물이나 영상물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예를 들면 사당 입구에 전장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의(義), 표(彪), 용(勇) 등의 다양한 장표가 쓰인 깃발이 펄럭이게 한다든지 간편하게 영상물을 켜고 감상할 수 있는 상영 공간이나 전시장이 마련되었으면 좋겠다. 요즘은 유튜브나 다큐멘터리 영화 같은 다양한 영상매체가 발달돼 있으니 쌍의사 관련 영상을 마련하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임진왜란이 무대가 되었던 영화나 영상들, 혹은 에니메이션을 이용해 작품을 만들면 훌륭한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학생들이나 일반인들에게 지역의 생생한 역사를 알려주는 것은 물론 진일보한 방법으로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산책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호흡할 수 있을 때 진정한 가치가 드러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