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이 깃든 봉강] 14. 솥처럼 둥근 마음, 부현(釜峴)마을 이야기

방승희 광양문화연구회원

2025-08-24     광양시민신문

소두방 바위와 솥모양 마을의 내력

부현마을의 지형은 커다란 가마솥을 닮았다. 산들이 둥글게 둘러싸고, 골짜기는 솥의 배처럼 깊고 포근하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흔히 동네가 옴팍하다고 말한다. 이 둥근 품이 바람을 막고 햇볕을 오래 머물게 하여, 아침 햇살이 가장 먼저 들고 저녁노을이 가장 늦게 사라진다.

마을 북쪽 고갯마루에는 소두방바구라 부르는 바위가 있다. ‘소두방은 솥뚜껑을 뜻하는 옛말이다. 이 바위는 크고 넓적해 실제 솥뚜껑을 떠올리게 한다. 사람 하나가 밀어도 흔들리고, 열 사람이 밀어도 같은 각도로 흔들리지만 끝내 굴러 떨어지지는 않는다. 주민들은 이 묘한 균형을 보며 마을을 덮어주는 보호막이라 여긴다. 바위가 솥뚜껑이라면, 그 아래 둥근 산자락은 커다란 솥몸이다. 부현이 솥고개’, ‘가마고개라는 이름을 얻은 까닭이다.

이 고개는 예부터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가마고개, 가막재, 까막재, 가무개, 거무고래 등으로 전해지는데, 어원을 따지면 큰산고개 아래에 든 마을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고개를 넘으면 옥룡으로 이어지고, 아랫마을 저곡에서 베어 온 닥나무를 부현의 가마에서 삶아 지곡마을로 가져가 종이를 만들었다는 전언도 있다. 솥은 단순한 조리 도구가 아니라, 생명을 익히고 먹을거리를 보태며 삶을 품는 공동체의 상징이었다.

부현마을 전경

봉화를 올리던 화전봉과 불의 길

부현 뒷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는 화전봉이다. 이름처럼 옛사람들은 이곳에서 봉홧불을 올렸다. 맑은 날 화전봉에 오르면 주변 능선이 한눈에 펼쳐지고, 마을 앞 매봉을 지나 고을과 고을을 잇는 봉우리들이 줄을 잇는다. 신호는 일제봉 방향으로 이어졌다. 불빛이 능선을 타고 달리던 시절, 그것은 급한 소식과 나라의 변고를 전하는 통신이었다. 화전봉은 고을을 지키는 눈이었고, 이웃을 부르는 입이었다.

오늘날 화전봉은 더 이상 봉화를 올리지 않지만 그 의미는 사라지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화전봉을 공동체의 경계와 배움을 되새기는 산으로 삼는다. 산에 오르면 시야가 열리고 마음이 환해진다. 아이들은 여기서 옛사람들의 지혜를 배운다. 불은 경보였고, 연대였으며, 멀리 떨어진 이웃과 마음을 잇는 끈이었다. 화전봉의 이야기는 지금도 서로의 소식을 살피고 재난에 대비하며 이웃을 돌보는 감각을 일깨운다.

부현마을 회관

세 성씨의 자리와 마을의 품성

부현의 역사는 세 성씨의 정착으로 기록된다. 가장 먼저 허씨가 들어왔고, 이어 주씨와 채씨가 자리 잡았다. 이씨, 박씨, 김씨가 흔한 세상에서 부현은 달랐다. 세 성씨는 때로 집안의 우열을 두고 다투기도 했으나, 세월이 흐르며 서로를 인정하고 화해의 질서를 세웠다. 지금은 여러 성씨가 함께 살고, 박씨도 한 분이 거주한다.

어르신들에겐 자부심이 있다. 아이들이 건강하게 태어나고 병약한 이가 드물었다는 것이다. 이는 햇빛이 일찍 들어오고 늦게 지는 마을의 형국 덕분이라는 믿음으로 이어진다. 회관 방송이 또렷이 들리고, 어디서 불러도 금세 닿는 거리감, 부르면 달려오는 친밀함이 마을의 품성을 만든다.

마을의 역사를 들려주신 어르신들. 박승규(81),주경섭(75),최인숙이장,허정렬(94) 주길계(83)

체육대회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마을 규모는 작지만 봉강면 체육대회에서는 늘 준우승 이상을 기록했다. 객지에 사는 자녀들도 대회 날이면 일부러 들어와 함께 뛴다. “단합이 좋다는 평가는 성적보다 더 큰 상이다. 회관에는 상장과 우승컵이 줄지어 서 있고, 어르신들은 그 앞에서 조용히 미소 짓는다. 승부보다 함께 땀 흘리고 기쁨을 나누는 일이야말로 마을의 기초 체력임을 보여준다.

작아서 더 좋은 20가구의 마을

부현에는 스무 가구, 마흔여 명 남짓이 산다. 규모는 작지만 그만큼 장점이 있다. 얼굴과 이름이 겹치지 않고, 서로의 사정을 두루 알아 의논이 빠르고 결정이 단단하다. 병문안을 놓치지 않고, 급한 일에는 손길이 곧바로 이어진다. 마을의 소식은 구석구석 퍼지고, 병약한 이의 대문이 자주 열리는 곳이 부현이다.

부현에서의 삶을 들려주신 어르신들. 박맹례(77),김정심(80),이정순(85),최인숙이장,정경림(88),백향순(77)

농토는 넉넉지 않다. 논농사는 거의 없고 들깨, , 고추 같은 밭농사가 살림을 떠받친다. 일제강점기에 만든 부현저수지가 이름을 달았으나, 마을이 높은 곳에 있어 물의 혜택은 주로 아래 마을로 갔다. 주민들은 겨울이면 저수지에서 썰매 타던 기억을 소중히 간직한다. 지금은 농사 규모가 줄고 산은 여전히 넓다. 그래서 주민들은 산과 저수지, 능선을 잇는 나무 덱과 구름다리가 있다면 외지인에게 쉼터를 제공하고 마을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으리라 말한다. 중흥산성 둘레길과 옥룡으로 넘어가는 길도 이미 잘 닦여 있다. 마을의 둥근 형상 자체가 훌륭한 관광 자원이라 주민들은 생각한다.

눈맞춤 하는 부현의 소

물론 생활의 불편도 있다. 회관 주변 주차 공간이 협소해 모임 때마다 차량이 겹친다. 회관 옆 감밭이 적당하지만 매매와 비용 문제로 사업은 더디다. 밭일 중 쉴 그늘도 부족하다. 그러나 주민들은 불편만 나열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회관 앞 운동기구 설치처럼 작은 변화부터 차근차근 쌓아 가는 습관이 이 마을을 지탱한다. 자연재해도 다른 마을보다 비껴간 경우가 많아 지세의 든든함을 믿는다.

역사의 현장 가마고개 안내판

가마고개 화장터와 4·3 사건이 일깨우는 역사

가마고개에는 지역의 아픈 역사가 응축되어 있다. 6·25 전쟁기, 공비 토벌과 혼란 속에서 희생된 이들을 실어와 장작더미 위에서 화장하던 자리가 있었다고 어르신들은 증언한다. 리어카에 실려 온 시신을 마주한 어린 눈은 두려움으로 가득 찼고, 그 기억은 오랫동안 고개를 마음 편히 넘지 못하게 했다.

이 화장터의 기억은 제주 4·3 사건에서 여수·순천 10·19사건으로 이어지며 국가 폭력의 상흔을 떠올리게 한다. 4·3 사건은 수년간 이어진 민간인 학살과 억압의 비극으로, 한국 현대사의 깊은 상처다. 부현의 어르신들은 가마고개의 화장터와 두 번의 사건을 함께 떠올리며 전쟁과 분단이 남긴 보편적 고통을 이야기한다. 지금은 안내판만 서 있을 뿐 현장의 흔적은 거의 사라졌다. 중흥산성 주변에 남은 탄피가 전쟁의 망각을 거부하는 작은 증거로 남아 있다.

봉강재의 의미와 오늘의 계승

부현에는 신안주씨 재실 봉강재가 있다. 해마다 후손들이 모여 제를 올리고, 조상 예순 분을 함께 모신다. 주씨 문중은 임진왜란 무렵, 400년 전 이 마을에 들어와 뿌리를 내렸다.

신안주씨 재실 봉강재

봉강재는 단순한 제향의 공간이 아니라, 마을이 하늘과 땅, 조상과 후손을 잇는 그릇임을 환기하는 자리다. 솥이 제의의 그릇이기도 했던 전통처럼, 봉강재는 부현의 제의의 기억을 이어 주는 핵심 유산이다. 오늘의 봉강재가 지닌 가치는 공동체의 연속성과 책임감에서 더욱 또렷하다. 조상을 공경하고 이웃을 살피는 마음이 곧 부현의 정체성이다.

부현마을 당산나무와 최인숙 이장님

이장의 애환과 마음의 무게

부현의 이장은 스스로를 꼼꼼한 성격이라 말한다. 일이 풀리지 않으면 밤잠을 설친다. 남편을 따라 마을에 들어온 지 25, 소를 키우며 살림과 생업을 꾸려 왔다. 세쌍둥이를 키워낸 여장부로도 이름나 있다. 자녀들은 제자리를 잡았고, 마을 일은 차분하고 단단히 챙긴다. 주민들은 흠잡을 데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요즘 들어 마음이 무겁다. 투석을 시작한 어르신, 암 진단을 받은 이웃이 있다. 아직 어린 자식을 둔 집안이어서 더 걱정이다. 표고버섯 재배지는 전기요금 급등과 자재비 상승으로 가동을 멈췄다. 14년 키워 온 생업이 하루아침에 중단된 것이다. 특용작물은 냉난방과 국산 자재가 필수라 외부 변수에 취약하다. 전기 계량을 낮추러 온 한전 차량을 바라보던 농가의 한숨은 마을 전체의 침묵으로 번져 갔다. 생업을 접는 이들이 늘수록 마을의 경제는 움츠러든다.

이장은 행정과 주민 사이에서 길을 찾으려 한다. 요구는 많고 협조는 엇갈릴 때가 있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작은 실천을 이어가면 마을은 다시 따뜻해질 것이라는 믿음이 이장의 에너지다.

부현마을의 돌담

20번 버스가 바꾼 일상

부현의 교통사는 20번 버스로 요약된다. 한때 마을버스가 다녔으나 이용 인원이 적다는 이유로 노선이 사라졌다. 대신 100원 택시가 도입됐지만 왕복 두 번 제한으로 생활권을 넉넉히 품지 못했다. 이장은 택시 제도 반납을 건의하고, 다시 버스를 달라고 요구했다. 여러 차례 협의 끝에 20번 버스가 마을 앞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버스가 정시로 다니자 변화가 생겼다. 장날에 맞춰 시장을 오가는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병원 예약이 있어도 마음이 덜 불안했다. 아랫마을 저곡까지도 쉽게 오갈 수 있고, 봉강에서의 고립감이 풀리자 마을 표정이 밝아졌다. 버스가 오가는 풍경만으로도 마을이 살아 있는 듯했다. 이장은 곧 그늘막과 의자가 있는 버스정류장을 세우겠다고 했다. 버스는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니라, 마을을 외부와 연결하는 혈맥이자 사람과 사람을 이어 주는 다리다.

부현저수지

솥의 그릇으로 내일을 익히는 마을

부현은 솥 같은 마을이다. 솥은 생명과 풍요의 그릇이고, 함께 나누는 공동체의 상징이며, 불과 만나 변화의 힘을 발휘하는 그릇이다. 또한 제의를 통해 하늘과 땅, 조상과 후손을 잇는 거룩한 매개이기도 하다. 소두방 바위가 하늘의 뚜껑처럼 마을을 덮고, 화전봉의 기억이 이웃의 소식을 잇는다. 봉강재가 전해 준 공경의 마음이 오늘의 배려로 이어지고, 이장의 작은 실천이 20번 버스의 길을 열었다.

스무 가구, 마흔여 명이 사는 이 작은 마을은 그래서 더 단단하다. 서로의 이름을 부르면 대답이 돌아오고, 어려움은 함께 나눈다. 역사의 아픔을 숨기지 않고 기록하며, 풍경과 길을 가꾸어 젊은 세대를 부른다. 부현의 솥은 오늘도 천천히 데워지고 있다. 불길은 조용하지만 꾸준하다. 언젠가 솥이 보글보글 끓어 넘치듯, 이 마을의 내일도 정과 희망으로 끓어오를 것이다.

사진=방승희 광양문화연구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