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이 깃든 봉강] 18. 사이 길이 많은 산림생태마을, 하조마을
하조(下鳥) 마을은 부암, 덕촌과 함께 조령리(鳥嶺里)에 속한다. 마을의 지형으로 보아 고개길 사이, 즉 산과 산 사이의 길을 새재라 하였는데 후에 이를 조치(鳥峙), 조령(鳥嶺)으로 불리었을 것이다. 봉강면의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성불로를 따라 끝까지 가면 천년고찰 성불사를 만난다. 마을 왼쪽에는 반월천, 오른쪽에는 성불천이 흐르다 마을회관 앞에서 합해져 백운저수지에 이른다. 남쪽으로 부암, 덕촌 마을이 있다. 봉강면의 다른 마을처럼 사면이 크고 작은 산으로 에워싸여 있고 봉강계곡의 물줄기 따라 좌우로 마을이 발달해 있다.
1914년 일제 강점기 행정구역 개편 이전에는 상조리, 하조리, 성불리 3개 마을이 있었는데, 여순사건과 6.25를 겪으면서 상조·성불 사람들이 하조로 내려와 한 마을이 됐다. 그런데 근래에 들어 외지인들이 들어와 옛 상조 지역에 새집이 꽤 들어섰다.
지난해 12월 31일 기준 73가구에 140명이 살고 있는데, 지난 20여 년 동안 귀촌한 이들이 열 가구가 넘는다. 은퇴 후 귀향한 이들까지 하면 전체의 1/3이 정도이다. 2005년 발행된 『광양시지』에 따르면 62가구에 171명이 살았으니, 20년 동안 11가구가 늘었고, 인구는 31명이 줄었다. 즉 가구 수는 오히려 18% 늘었고, 인구수는 12% 감소했다. 같은 기간 우리나라 농촌은 가구 수와 인구수는 각각 21%, 36% 감소하였으니, 이 마을은 아주 예외적인 현상이다.
아마도 이 마을의 풍광에 홀딱 반한 ‘시티 걸’ 복 씨 네 자매처럼 새집을 지어 이사를 오거나 은퇴 후 귀향하거나 주말주택으로 이용하는 이들이 이곳에 주민등록을 두는 경우일 것이다. 하조 마을도 급속한 고령화는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그 속도는 다른 마을보다 좀 더딜 것이다.
마을을 지키는 용란송
김세광 씨의 안내를 받아 동네를 한 바퀴 걸었다. 우선 마을의 첫째 보물이자 상징은 아주 기품이 있는 소나무 두 그루, 이름은 용란송(龍卵松)이다.
1982년 보호수로 지정 당시 130년 나이로 추정됐다. 높이는 10m, 둘레는 3m 정도로 마을과 주변 산들과 아주 잘 어울려 보였다. 두 팔은 하늘을 향해 뻗으면서도 너무 크지 않아 보는 이의 마음이 편안하다. 하루 십여 차례 다니는 시내버스가 종점인 이곳에서 용란송은 변함없이 서서 주민들과 방문객을 반갑게 맞이한다.
하늘에서 보면 용란송이 있는 지점이 새 머리에 해당하여 새가 목이 마르지 않도록 마을 사람들은 낮은 보를 막았다. 덕분에 소나무도 가뭄에도 잘 견뎠다. 한편으로 용은 알이 급한 물살에 떠내려가지 않아 안심하였고 대신 마을을 잘 지켜 왔다. 언젠가 알에서 용이 부화하여 하늘로 오를 때까지 주민들은 이 나무를 아끼고 잘 보호할 것이다.
관광자원이 풍부한 산림생태마을
우리는 옛 과거 길을 복원한 마을 둘레길을 찾아 나섰다. 인적이 드문 총 4km 산길이다. 초반 경사가 심하지만 조금 지나니 아주 평탄한 숲길이 구불구불 이어졌다. 9월 중순인데 비 온 직후라 후덥지근하고 땀이 비 오듯 했다. 어디선가 가을바람이 살짝 불어온다. 싱그러운 이파리가 손을 흔들며 콧노래를 청한다. 차량이 없던 시절, 광양에서 한양을 가려면 괴나리봇짐을 메고 이 고개를 지나 구례 간전으로 먼 길을 갔을 터인데 무슨 생각으로 고단함을 이겼을까? 문득 구례 스승 왕석보 선생을 뵈러 이 길을 걸었을 매천 황현을 떠올렸다. 나라 걱정이 많은 그를 나무와 바람이 위로했을 것이다.
하조는 마을 둘레길 말고도 백운산 둘레길 제8코스 달뜨는 길 구간(8.4km)이기도 하다. 마을회관에서 위쪽으로 향하여 1.3km를 걸으면 성불교를 만난다. 여기서 왼쪽으로 접어들어 7.1km를 가면 월출재에 이른다.
사랑하는 광양에서 평생을 살겠다고 공언했던 필자가 백운산 둘레길 한 바퀴를 못 걸었다니 부끄러웠다. 좀 더 가을이 익으면 낙엽 가득한 둘레길을 혼자라도 걸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길가에 벤치나 시(詩) 간판 몇 개를 세우면 한층 여유와 운치가 더 할 것 같다.
꿈을 키우는 천문대와 다양한 체험활동
둘레길을 내려오니 길가에 멋진 집들이 많다. 그런데 지붕이 돔 모양인 건축물 해달별 천문대가 보인다. MBC에서 퇴직한 천체연구가 정호준 씨가 광양의 어린이들에게 꿈을 심어 주기 위해 퇴직금을 털어 이곳에 세웠다. 사전 예약을 하면 적은 비용으로 망원경으로 별을 관찰하고, 별자리 이야기도 듣고, 천체투영관에서 밤하늘도 볼 수 있다. 국가가 할 일을 사재를 털어 이문 없는 일을 하시는 정 선생님 부부가 존경스럽다.
하조는 산골이라 달뱅이논(다락논)이 많아 ‘산달뱅이 마을’로 불리기도 한다. 그래서 고로쇠를 시작으로 감, 매실, 두릅, 더덕 등 임산물이 풍부하다. 겨울 고로쇠와 여름 계곡 손님을 받는 식당이나 민박집이 많다. 이런 까닭에 2018년 산림청이 선정한 ‘여행가기 좋은 우수 산촌생태마을 10선’에 이름을 올렸다. 천문대에서는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 보고, 길가에서는 반딧불을 동시에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아로마테라피, 아로마 향초나 비누 만들기. 훈증테라피, 매화비즈 공예, 도자기 만들기, 감물 염색 체험, 두부와 도넛 만들기 등 다양한 체험활동을 할 수 있다. 덕분에 한국임업진흥원으로부터 산촌 관광 모니터링을 통한 프로그램 홍보 및 팸투어 등 운영 활성화 경비를 지원받기도 했다.
마을에는 오토캠핑장도 있다. 봉강계곡과 백운산이 어우러진 이 조용한 곳에 오토캠핑장이 들어서 혹시 소음이나 오염되지 않을까 염려했으나 요즘 높아진 환경의식 덕분에 그런 걱정은 별로 없단다. 캠핑장에는 40여 개의 캠핑 사이트가 있으며, 전기 시설과 24시간 따뜻한 온수가 나오는 샤워실과 화장실, 개수대 등을 갖추고 있다. 옆 계곡에서 물놀이와 다슬기잡이 체험을 할 수 있으며, 계절별 과일 따기도 가능하다. 김세광 씨는 능력이 된다면 마을 둘레길을 잘 개발하여 광양의 대표적인 힐링 코스로 만들고 싶다고 한다. 그의 안내하는 품새에서 마을과 이웃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물씬 느껴진다.
그가 운영하는 레스토랑 ‘하조나라’의 특별한 메뉴인 화덕 피자를 맛보고자 했으나 집안의 특별한 사정으로 당일 휴업이라고 했다. 그런 와중에도 시간을 내주어 정말 고맙다. 그런데 입간판 아래 ‘Harmony & Joy’라는 재치 있는 글자가 보였다. 여러 차례 방문했으나 처음 눈에 띄었다. 이곳에 오시는 손님들이 자연과 이웃과 하모니를 이루고 조이풀 하시길 바라는 마음이리라. 직접 구운 화덕 피자 외에도 여러 야채샐러드와 음료수도 있다. 물론 손님들은 평상을 이용하거나 안전한 계곡에서 물놀이를 할 수 있다. 족구장도 있어 회사의 단체 손님들이 묵을 멋진 펜션도 있다. 이런 일을 하려면 얼마나 힘들까 싶은데 이 부부는 문필가이시다. 그들의 글을 읽노라면 스코트 앤 헬렌 니어링 부부가 떠오른다. 늘 잔잔한 미소를 잃지 않는 그들의 삶은 자연과 이웃과 어울려 노는 놀이 같은 것일까?
주민들의 스승
무현 스님 101세로 입적하시다
직장에 다니는 이장님을 뵐 수 없어 대신 마을의 원로이신 유병우(80세) 씨를 찾아 성불사에 갔다. 알고 보니 성불사 큰 스님 무현(無現) 스님이 9월 12일 101세로 입적하셨는데, 그는 장례위원으로서 바빠서 사찰에서 만나자고 했다.
평생 마을에 사시며 감·매실·고사리·고로쇠 농사를 하신 유 어르신으로부터 무현 스님 이야기를 들었다. 스님은 아주 너그럽고 소탈하시어 지역 주민들과 잘 소통하셨다. 그 많은 사찰 중창을 하면서도 큰 소리 한 번도 내지 않으셨다. 그의 법명처럼 무엇을 내세우지 않음으로써 세상과 하나 되려고 애쓰셨다.
그래서 하조 마을 사람들은 종교와 상관없이 성불사에 자주 다니고 스님 말씀을 잘 따르며 존중했다고 했다.
한 지역민은 오래전 스님이 절에 맡겨진 고아를 잘 키워 훌륭한 외교관으로 성장시켰다는 일화를 전해 주었다. 뒤늦게 퇴근하신 조진국 이장도 서둘러 성불사로 갔다.
무현 스님은 대한불교용화종 3세 종정으로, 여순사건과 6.25를 거치면서 대부분 소실된 사찰들을 1966년부터 중창했다. 성불사는 도선(827~898년)국사가 창건했다고 하는데 기록은 없고 고려시대 와편들이 출토됐다. 또한 조선 숙종 때 광양현감 임준석이 이곳을 찾아 시를 읊었다는 것으로 보아 오랜 역사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성불사는 전남 유일한 용화종파로서, 타 종파는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것에 비해 용화종은 석가모니불 다음에 오실 미래의 부처인 미륵불을 모시며 고통 없는 용화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현재 대웅전, 관음전, 극락전, 범종각, 일주문,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오층석탑 등 웅장한 규모를 이루고 1천여 신도가 불법을 깨우치고 있다.
동학농민군 함성이 왁자했던 마을
탐방을 마치고 귀가할 즈음, 밤밭 풀베기를 막 마치신 조일문(85세) 씨가 사륜농운기를 몰고 마을회관에 오셨다. 키도 크고 밭일을 하실 정도로 연세에 비해 매우 건강해 보이셨다. 젊어서 도시에 살다가 은퇴하고 고향으로 귀촌하셨다. 그는 일제 강점기, 여순사건, 6.25 등 숱한 기억들이 많았는데 한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했다. 그것은 마을이 이렇게 흥한 것은 동학도들의 덕이 아닌가 싶다는 것이다.
광양은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경상남도 하동과 인접해 있다. 1890년대 하동이나 진주 등 경상도로 진출하거나 후퇴할 때 동학농민군은 광양을 근거지로 삼았다. 광양은 영호도회소의 주력부대의 무대였다. 1894년 6~7월경 광양 농민군과 하동의 부사와 토호들이 조직한 민병 사이에 섬진강 일대에서 수차례의 충돌이 있었다.
특히 하조는 동학도의 본거지이며 성지이다. 조두식은 하조 출신인 유수덕, 유하덕으로부터 동학을 전수 받고 후에 천도교 교구장까지 했다. 봉강 출신 박홍서는 접주로서 농민군의 지도급 인물이었다. 유(劉) 씨 후손들 몇 가구가 아직 살고 있다. 주민들은 유하덕의 묘로 추정되는 낮은 봉우리를 잘 알고 있으나, 묘비 하나 없어 쓸쓸하다. 동학 관련뿐만 아니라 더 많은 이 지역 역사의 비화를 들었지만 지면에 다 담지 못해 아쉽다.
용이 알을 품듯 마을 지키고, 동학농민군들의 기운이 서린 하조 마을 주민들이 지금처럼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잘 지키고 인근 성불사 범종 소리처럼 널리 맑고 고운 인심을 계속 펼치시길 바란다.
제공=박발진 광양문화연구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