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규 흥학비 비각 건립

안영신 국사편찬위원회 광양시 사료조사위원

2025-10-12     광양시민신문
안영신 국사편찬위원회 광양시사료조사위

조선 오백년 교학진흥책은 학교는 풍화의 근원이 된다는 생각하에 최고 학부인 성균관에서 흥학을 위해서는 여러 가지로 힘썼다. 한편 역대 임금들은 교서(敎書)를 내리어 성균관 유생들을 근면케 하였다. 그 교서의 내용은 인재 양성을 위해 유학을 높혀 그때 그때의 필요성에 따라 임금들이 큰 관심을 가졌다. 세조 5(1459)에는 근면의 교서가 내리었고, 명종 11(1556). 인조 원년(1623). 숙종 17(1691). 정조 18(1794.) 순조 11(1811)에 각각 성균과 유생들에게 교학 진흥을 위한 교서가 내려졌다. 특히 명종 13(1558)에 왕이 대사성 이황(退溪)에게 명하기를 학교는 풍화의 원()인데 퇴비(頹靡)가 이미 심하다. 그대는 글에 능하고 청근(淸勤)하여 교회(敎誨)의 임()에 적합함으로 맡기노니 나의 지극한 생각을 명심, 마음을 다하여 가르쳐 학교를 진흥시키고 사습(士習)을 바로 잡아라하고 초모(貂帽)와 주찬(酒饌)을 하사하였다. 역대 왕들도 장학(獎學)의 대례(大禮)로서 친히 문묘에 참배하고 명륜당에 왕림하여 근학(勤學)을 하였다. 이와 같이 나라에서 백성들의 교학 진작에 힘써 왔듯이 전국 각 고을 향교에서도 주민들의 배움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광양항교에서도 선비 배출에 노력하였음이 기록으로 전해온다. 향교에서 서재 동재에서 수학을 한다고 하나 그 외 나머지 유생들의 수학을 위해 마련한 공간이 곧 흥학재다.

조선시대 때 광양 흥학재 문헌을 살펴보면 국가 기록은 없고 향토사지로는 광양읍지(1858), 1차 호남읍지(1871), 2차 호남읍지(1895)의 기록으로 在 鄕校南久有興學齋而 累經兵火只 傳 其基士人 徐昌佑 鄭壽甲 鄭壽龜 鳩財買土多年 經紀而 未果 甲辰冬 縣監禹禎圭 邑子 謀構其齋 又置田畓以 備接土之 所畓結九十二負束 향교 남쪽 옛부터 있었던 흥학재가 누차 병화로 없어졌는데 다만 전해오는 얘기에 의하면 그 터에 사인 서창우. 정수갑. 정수귀가 다년간 토지를 마련했으나 결과를 보지 못하고 지내던 중 갑진(1785)겨울 현감 우정규가 고을 원님으로 와서 그 터에 방안을 강구 또 토지(전답)를 다듬어 선비들 맞을 곳을 갖추고 답 결92 5”라고 전해져 오는 기록과 1850(철종1)광양현각소사례책8p에도 우정규 흥학재 기록이 있다.

광양읍지(1858)

향토사지별로 보면 일제 강점기 1925년 광양군지(희양지)1936년 조선환여승람에도 광양읍지(1858)와 유사한 기록으로 박휘진이 지은 현감 우정규(禹禎圭:1783.1-1785.6)흥학비비문이 있고, 1938년 박종범공이 역은 희양문헌집(2024 출간)1권에도 역시 박휘진이 지은 현감 우정규 흥학비(1775)와 평강 채헌영 지은 흥학실기(1892)가 있으며, 이천 서현두공이 지은 흥학재 상량문은 조선말엽 이후 처음으로 1983년도 광양군지에 기록이 밝혀진다.

이로보아 흥학재에 따른 문장으로 3건이 전해져 오는데 맨 처음이 1785년 박휘진옹이 지은 현감 우정규 흥학비로 광양향교를 들어 가자면 풍화루 좌측편에 13개의 비가 횡으로 즐비하게 서있는데 그 중 가장 가깝게 서 있는 것이 현감 우정규 흥학비이다. 두 번째로 나온 것이 1828년 백노수(白魯洙:1828.12-1829.9)현감 때 이천 서현두(徐顯斗) 공이 지은 흥학재 상량문이 있으며 세 번째가 1892년 민영조(閔泳祚:1892.1-1893.4)현감 때 평강 채헌영(蔡憲永) 공이 지은 흥학 실기편액이 광양향교 덕성재 대청(大廳)에 게시 되어 있다. 이 셋이 흥학재 기문(記文)으로 전해져 온다. 그 중 첫 번째 박휘진이 지은 기문만이 비석인데 이 비석의 규모는 전체 높이 206cm, 비신높이 145cm, 비신너비 45cm. 비신두께 13cm이다. 이러한 비석이 오늘에 있어 240여년의 풍화로 세세년년 바닥면(전면 하단부)이 여기저기 균열이가 글자가 마모 가능성이 높아감에 보존관리를 위해서는 가능한 빨리 비각 건립이 절실히 요구된다.

현감 우정규 흥학비

박휘진이 지은 현감 우정규 흥학비기록을 보면
본현에는 옛날부터 선비가 학업을 익히던 곳인 흥학재가 있었는데 흥학재가 무너진지 오래되어 그 이름만 전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사인(士人) 서창우(徐昌祐)와 정수갑(鄭壽甲)공이 항교의 임원으로서 재물을 모으고 정수귀(鄭壽龜)공과 함께 도모하여 땅을 사고 양식을 모을 곳을 갖추었다. 지난 임술(1742)년에 현감 임원(任遠)이 고을에서 학사가 없다는 사실에 개연히 탄식하여 죽사(竹寺)를 재()로 만들고 또 속곡전(屬公田)을 주고자 하였다.

그런데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현감은 곧 체직(遞職)되었으니, 단지 절목(節目) 한 책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번에 부임한 우정규 현감은 정사에 학문을 우선시하여 권과(勸課:학생의 공부를 권면하는 것)에 부지런하였으니, 선비의 풍속이 변하지 않았고 문장재주가 성대히 흥기하였다. 이듬해 갑진(1784) 겨울에 마침내 고을 사람의 자제들과 흥학재를 세울 것을 도모하고 또 선비를 양성하는 비용으로 소속시켰으니, 아아. 아름답도다! 사문(斯文) 정영보(鄭榮甫)는 정수귀공의 손자로서 조부의 뜻을 이어서 일을 감독하여 흥학재가 이에 완성되었으니, 일이 우연한 것이 아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 현감은 화락한 사람으로 학문은 넓고 문장은 넉넉하였으며 정사는 청렴하고 사람은 온화하여서 뽕나무와 삼나무가 백 리에 깔리고 간 곳마다 은덕을 베풀었으니, 학문은 바로 나머지 일이다.

고을의 원로인 서윤화(徐潤和)와 허연보(許挻甫)군이 고을의 선비들과 도모하여 흥학재 곁에 돌을 세워 아름다운 선정을 칭송하였다. 서군은 사창우의 자제이니, 긍구의 뜻이 또한 여기에 붙혀있다. 재주가 없는 나는 서석(瑞石:광주)에서 와서 옥룡동에 우거하여 듣고 눈으로 봄에 흠앙하고 탄식하는 마음을 이길 수 없어 마침내 명()을 지어 다음과 같이 말하노라.

齋奚以作/흥학재는 어찌하여 만들어졌나 作之者侯/만든 이는 우 현감이라네 學奚以興/학문은 어찌하여 흥기하였나 興之者候/흥기 시킨자 우 현감이라네 侯來何暮/우 현감 어째서 늦게 오셨나 齋始焉構/흥학재가 비로소 건립되었네 興於是齋/이 흥학재에서 흥기하고 惟侯是慕/우현감을 사모하네 숭정 기원후 을사(1785,정조9)년 늦여름, 평양후학 박휘진(朴徽鎭)”라고 전해져온다. (우정규 현감은 또 봉강 신촌에 있는 형제의병장 강희보 강희열 묘역을 찾아 사초를 하고 배향하는 사당을 지어 향사(享祀)를 올림으로서 광양현감 중에서 박세후 현감 치적을 1위로 할 때 이와 버금가는 문과 출신 우정규 현감이다.)

광양향교 앞의 비군림을 살펴보면 하마비를 비롯 13기가 비석이 있는데 비의 종류별는 하마비가 1, 흥학비가 1, 기적비 1, 불망(찬양)7, 공적(공덕)비가 3기이며, 1백여년 전후로 보면 1백여년 이후에 세운 것이 8기이며 1백여년 이전에 세운 것이 5(하마비 포함)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현감 우정규 흥학비이다. 하마비(1638)를 제외하고는 향교에서 제일 오래된 비석이다. 이와 달리 유당공원 비군림을 살펴보면 16기 비석이 있는데 13기가 1백여년 전에 세워졌고 3기가 1960년대 이후에 건립되었다. 여기에도 흥학재와 관련된 비석은 전혀 없다. 그러면 전남 선비의 고장 담양을 보면 담양은 당시 부사가 근무했던 큰 고을이라고 하지만 향교 비군림을 살펴보면 15개 비가 있는데 그중 3개 비석이 1960년대 이후 세운 것이고 나머지 12개가 120-130년 이전에 세운 비석으로 전면(표석)을 보면 흥학이란 용어가 안 들어간 비석이 없다. 광양은 적은 고을이라고 하지만 광양향교 비군림를 보면 오직 현감 우정규 흥학비 비석 하나로 볼 때 그 중요함과 역사성은 대단하다 할 것이다. 고로 유림의 한사람으로서 안타까운 마음이다. 더 늦기 전에 광양시에서나 광양향교에서는 서둘러 봉양사에 신재 최산두 유허비(1775)와 봉양사 사적비(1856)’2016년에 비각 건립해 보존하듯이 광양향교에도 현감 우정규 흥학비(1785)’하마비(1638)’ 비석도 보호하기 위해서는 비각 건립이 꼭 필요하다.

지금으로부터 약 4백여년 전에 세운 하마비 비석을 보면 광양향교 일주문(홍살문) 오른편에 위치한 비석 전면을 보면 大小人員皆下馬: 대소인원개하마라는 기록과 후면(음기)를 보면 崇禎九年五月日立 / 有司 金汝鑑. 鄭興門. 徐尙卨. 숭정 9(1638) 5월 일/ 유사 김여감/ 정흥문/ 서상설라고 하는 기록이 있는데 이 비석 역시 오래되어 광양향교에서는 본 비석을 그대로 둔채 그(일주문)옆 좌측편에 모조비를 세웠다. 그 기록을 보면 전면은 구비석(舊碑石)이나 동일하고 후면(음기)를 보면 旣堅于此所年久歲深舊碑毁損故涇儒論改竪議定焉 孔紀二千五百四十三年八月 日 掌議 宣炯宰改竪 典校 徐廷敏 識. 옛날 이 자리에 세워졌던비가 오랜 세월로 심히 훼손되어 유림들과 협의하여 새로 세움. 공기 2543(서기 1992)8월 일. 장의 선형재 전교 서정민라고 새긴 새로 세운 비석을 보면 그때 당시 유림들도 370여년 전에 세운 하마비를 향교의 중요 문화재(유물)로 인식하였기에 후세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년년히 마모되어가는 것을 보다못해 비각은 못 세우고 새로 모조품 비석이나마 다시 세운 것으로 짐작이 된다. 광양시의 금석문에서 제일 오래된 비가 유당공원에 이대근 충신 겸근비(1636)’이며 두 번째가 이 하마비(1638)이다. 그러므로 박휘진이 지은 현감 우정규 흥학비대소인원 하마비’ 2기 비석은 유당공원 15기 광양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받은 비석보다 뒤지지 않은 역사성이 있는 비석으로 향토문화유산으로도 곧 지정이 되어야 할것으로 사료된다.

그리고 하마비 음기에 기록된 유사 3분 중 두분(정흥문·김여감)은 행적을 못 찾았으나 서상설공의 기록을 보면 광양읍지(1858)에도 그의 기록이 있으며 일제강점기 1925년 광양군지(희양지)지에 그의 행적이 있다. 그 기록을 보면 본관은 이천으로 성균관 제주(祭酒)를 지낸 의()11대손이다. 1629년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절충장군, 행용양위사과(折衝將軍,行龍驤衛司果), 행 선전관(行 宣傳官), 현신교위오위도총부도사(顯信校尉五衛都摠府都事) 겸 대구영장(大丘營將), 행백두진수군절제사(行白頭領水軍節制使), 행고령진병마절도사(行高嶺鎭兵馬節制使)를 역임하였다. 인조 병자호란 당시 홀로 말을 달려 임금이 있던 남한산성으로 달려갔다. 임금 앞에서 철 화살과 화약이 쌓여 있었는데 병졸이 무게를 달아 나누어 주는 것을 보고 화난 목소리로 말하기를 지금 어느 때인데 이렇게 천천히 하는가?“ 하고는 손으로 화살과 화약을 움켜 쥐고 나누어 주었다. 임금이 이를 보고 기특하고 장하다고 여겨 훗날에 호가공신(扈駕功臣)이 되고 병조참의를 추증받았다라는 기록과 1983년 광양군지에는 이천인, 진월면 송금출신. 1629년 무과 등과. 1636년 인조 병자호란 때 적을 막아 싸움, 대구영장 백령수군절제사를 역임하였다. (10대손, 옥룡면 죽천리 서병기)” 라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 어떤 인물인지도 알 수 있듯 아주 중요한 사적기록이다. 이천서씨 원숙공파보 하권143쪽에 의하면 서병기(1936)씨가 10대이며 11대 후손으로는 민호(1968)와 정호(1971)가 있다.

위와 같이 현감 우정규 흥학재 비문과 하마비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았듯이 두 비()를 한해라도 빨리 서둘러 보호각을 세워야 함을 바라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