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이 깃든 봉강] 20. 역사의 무늬를 만드는 석평(石坪)마을
박옥경 광양문화연구회원
돌무뎅이 마을
“이만치나 커다란 돌이 두 개 있었고 그 사이로 길이 있어서 부녀자들이 물 길러 다닐 때 돌을 비켜 다녔어. 큰 돌이 많아서 우리 마을을 돌무랭(뎅)이라고 불렀지”
“도무지 자랑거리나 별난 이야기가 없어. 어릴 때 돌 밑을 지나다녔던 게 가장 기억에 남아”
도로변에 붙어 있는 석평마을 회관을 찾는 건 쉬웠다. 이장님과 몇 번의 통화 끝에 곡식이 실하게 익어가는 평화로운 마을 입구에 들어섰다. 마을 회관에서 어르신들 여럿이 깃발 만들기를 하고 계셨다. 둘러앉아 열심인 모습이 마치 초등학생들처럼 천진해 보였다.
마을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냐고 했더니 팔을 벌려 돌의 크기를 가늠하며 돌무뎅이 이야기부터 꺼내셨다. 석평은 ‘돌무뎅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된 마을 이름이다. 큰 돌이 있었고 돌이 많았다고 하는 것을 보면 고인돌이 꽤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보이는 모습 그대로 부르다가 이름으로 굳어진 곳. 석평도 그중 하나이다.
마을회관 건너편에 있는 ‘돌무랭이’라는 식당도 마을 이름과 관련 있는지 물어보았다. 꼭 그렇지는 않다고 하시는데 마을 이름과 같은 상호라서 기억하기 쉽고 친근해 보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박광기 대표가 알고 있다고 이구동성으로 추천해 주셔서 찾아 나섰다.
봉강친환경영농조합법인 박광기 대표 작업장은 마을 회관에서 멀지 않았다.
먼저 돌무뎅이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집 앞 텃밭에 큰 돌 4개가 여기저기 있는데 고인돌로 추정된다고 했다. 흙속으로 들어갔지만 어느 정도 보존된 상태라고 해서 들러보았다. 깨, 호박, 고추 등이 익어가는 중인 텃밭 초입에 큰 돌 하나가 눈에 띄었다. 다른 것들은 돌이라는 것만 알 수 있을 정도로 흙 위로 나와 있었다.
텃밭을 사이에 둔 앞집에 돌을 비켜 부녀자들이 물 길러 다녔다는 고인돌이 있었다고 한다. 흙을 메우고 그 위에 창고를 지어서 지금은 아예 찾아볼 수가 없다. 적어도 청동기 시대라는 지석 건축물 위에 현재라는 건물을 올려놓았으니 창고는 몇 세기의 역사를 품고 있는 셈이다.
닥나무와 베틀놀이
석평마을은 왜정시대 행정구역개편 이전에는 봉강면 석평리였으나 1917년 행정구역 개편 후에 월곡리, 내저리, 부현리와 함께 통합되어 부저리가 됐다. 1987년 부저리 부저1구가 되어 석평이라 했다.
조선 숙종 때 합천 이씨가 처음 정착하였으며 상주 박씨, 함안 조씨 순으로 입향하여 마을을형성했다고 전해진다. <광양시지 참고>
부저리에는 한지의 원료인 닥나무가 많았다. 그래서 닥실(딱실)로 불렸다. 닥나무 껍질을 찌고 벗겨낸 흰 속껍질(백피)을 물에 불리고 두드려 부드럽게 만든다. 닥풀과 섞어 물에 풀어 얇고 튼튼한 종이를 떠서 만들면 한지가 되는데 이 과정에 많은 물이 필요했다. 가마고개(가모개)에서 삶은 닥껍질을 석평교 아래 냇물로 옮겨 씻었다. 백운산 계곡을 타고 내려오는 맑고 철철 넘치는 냇물에 충분히 씻겨진 닥나무는 양질의 한지가 되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석평의 또 하나의 특징으로 베틀놀이를 들 수 있다. 15명 정도의 인원으로 “쉬엉쉬엉 베틀놀이 쉬엉쉬엉 가세”로 노래를 시작했다. 노동의 고달픔을 덜어내고 긴 시간 동안 베 짜는 지루함을 달래기 위한 노래였다. 2000년경부터 광양시를 대표하는 민속놀이로 목포, 해남, 여수 등 민속경연대회에 참가하여 입상했다. ‘광양시민의 날’ 행사에도 해마다 참여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 이 베틀놀이 대회에서 입상한 상금으로 2006년도에 마을회관 2층을 지었다고 한다. 협동과 신명의 베틀놀이가 이어지지 않아 지금은 사라져 버린 민속놀이 중의 하나가 됐다.
도로의 중심지 석평 사거리
요즘 석평마을은 인기가 좋다. 광양읍에서 가까운 곳에 있어 전원주택을 짓기에 적당하기 때문이다. 석평 사거리는 옥룡, 구례, 순천, 광양읍으로 가는 도로의 중심지가 된다. 주민들은 도로 정비가 잘 된 것을 마을의 가장 좋은 점으로 꼽고 있다.
마을 회관이 옥룡으로 오가는 도로 바로 옆에 있어서 출입할 때 위험 요소가 있기는 하다. 그래서 광양시에서 속도방지턱을 해주고 도로 관리를 잘 해주어서 특별히 불편한 것은 없다고 한다.
마을회관을 잘 운영해주는 것도 좋은 점으로 꼽는다. 건강과 재미를 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필요한 인원을 파견해 주는 것에 높은 점수를 준다. 냄새나던 축사가 이전되어 냄새가 안 나니 그 점도 너무 좋다고 한다. 도로가 놓이고 편하게 광양읍에 오가기 시작한 것은 1961년 백운저수지가 준공되고부터였다. 모두 그 하나의 도로를 통해 읍으로 장을 보러 가고 학교에 다녔다.
이사순 어르신 (90세)은 17세에 골약에서 석평으로 남편 얼굴도 모르고 시집왔다고 한다. 학생이던 남편은 18세였다. 집도 몇 채 없는 산골이라 막막했던 그때부터 살아온 세월이 오늘이다. 어디 먼 데나 다른 지방에 가본 적도 없고 오로지 석평에서 한세월 보냈다. 해산물이 많이 나는 골약에서는 바지락, 꼬막 등을 먹을 수 있었다. 장날 꼬막을 사 왔더니 시어머니가 그걸 어떻게 먹냐고 해서 ‘꼬막도 해먹을 줄 모르다니 여기는 살 곳이 못 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굳이 봉강으로 시집오게 된 연유를 물었더니 부모님이 양반을 찾다가 봉강이 양반 마을이라 그리된 것이라고 한다.
“장날엔 못해도 세 번은 쉬어 오고 가고 하던 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도로가 답답한 가슴 뚫린듯 뻥 뚫려 좋아. 이젠 우리 마을이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고 산골도 아니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
3개 마을이 모인 석평
백운저수지가 1962년(조양마을)과 1961년(지곡마을)에 각각 준공되면서 이들 마을의 일부가 수몰됐다. 석평은 1반, 2반, 3반의 세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고 3반은 수몰된 이주민들 일부가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다.
백운저수지를 지나 석평교 들어오기 직전 오른쪽 마을이 3반 ‘한다식’ 마을이다. 백운저수지 속으로 들어간 조양마을 이주민들이 사는 곳이다. 지금은 7가구 정도 살고 있다. 석평교 바로 옆에 있는 마을을 ‘아랫돔’이라고 부른다. 여기는 15가구 정도 살고 있다. 윗돔이라고 부르는 곳과 이 두 마을이 합쳐 석평 마을을 이룬다. 백운저수지를 만들기 전에는 조양마을 한가운데 길이 있었다.
최산두 선생도 그 길을 걸어서 서당에 다녔다고 한다. 책을 들고 서당으로 향했을 최산두 선생과 바쁜 걸음의 사람들을 그려 보았다. 물속 풍경이 아련하게 떠오르는 듯해서 백운저수지를 지날 때면 필자의 시선이 저수지에 길게 머물곤 한다.
역사의 흔적
마을 뒤로 높고 큰 자태로 위용을 뽐내고 있는 산, 촛대봉이다. 6·25전쟁이 발발한 때부터 종전까지 10~20명이 24시간 근무하던 곳이다. 석평마을에 거주하던 임시경찰 김원중이 책임자로 있었다고 한다. 여순사건 당시 초소로 썼던 곳은 아직도 돌이 쌓여 있다. 지서로 신호를 보냈던 역사의 현장이다. 무엇을 채굴했는지 모르는 5m 정도의 수직 채굴광도 중요한 역사의 무늬를 그리고 있다.
최산두 선생이 바위에 말을 매 놓고 물을 먹였다고 하는 석평교에 얽힌 이야기도 재미있다. 큰 비위 3개가 석평교 아래 냇물을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사진에 담을 수 있을까 하고 찾아갔지만 풍화에 사라져 버린 지 오래라는 듯 석평교 위로 현대식 승용차들이 달리고 있었다.
마을 풍경에 한몫하는 아름드리 정자나무가 떠내려간 것은 태풍 매미가 왔을 때다. 지금은 단정하게 지은 우산각이 그늘 아래 쉬고 놀던 정자나무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4년 차 이장 일을 하고 계신 박학기 이장님은 여느 이장님처럼 너무 부지런하시다. 윗마을에 갖다 줄 게 있다고 가시더니 함흥차사다. 마을 주민들과 함께 사진을 못 찍은 아쉬움이 남는다.
백운저수지와 촛대봉과 석평교가 역사를 말해주는 곳에서 석평 사람들은 오늘의 무늬를 만든다. 변하는 것들 속에서 옛것과 오늘의 것을 융합하며 역사를 써내려 간다. 돌무뎅이부터 시작해서 현재 살아가는 모습까지 들려주신 분들 얼굴에 즐겁고 건강한 기운이 흘렀다. 풍요의 가을, 필자는 석평에서 긍정의 에너지를 받고 돌아오는 길이다.
제공=박옥경 광양문화연구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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