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이 깃든 봉강] 21.문화인물 매천 황현
1999년 8월의 문화인물
매천 선생의 문화인물 선정과 기념 사업은 묘역과 사당 정비, 공원 조성과 생가 복원 등 매천 선생을 기리는 사업에 탄력이 붙게 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1990년 7월부터 이달의 문화인물을 한 사람씩 선정하여 기념하는 사업을 했다. “문화비젼 2000 문화의 세기가 오고 있다.” 구호를 내걸고 민족문화창달에 이바지한 역사적 인물들을 재조명하여 문화적 긍지와 자부심을 일깨운다는 취지였다.
1997년 문화예술팀장이 된 필자는 전남의 거의 모든 시군에 문화인물이 있는데 광양에는 없어 자존심이 상했다. 여름 무렵 문화 인물을 추천하라는 공문을 받았다. 도선국사와 신재 최산두, 매천 황현을 추천 대상으로 꼽았다.
살펴보니 도선국사는 영암에서 추천해서 1996년 7월의 문화 인물로 이미 소개되었다. 신재 최산두 선생은 5백 년 전에 활동하신 분이라 발자취를 더듬어내기가 어려웠다. 매천 황현 선생은 국사 시간에 배운 바가 있어 친숙했다. 봉강 서석마을에 생가터와 묘소가 있고, 인근 구례에 매천사와 유물전시관이 있어 선생의 자취가 선명했다.
11월 말, 1999년 8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었다는 통보가 왔다. 매천 선생이 돌아가신 날인 1910년 8월 29일(음력 8월 7일)을 기린 8월의 문화인물 선정이었다.
문화인물로 선정되자 기념 사업을 준비하기 위해 구례에 사는 후손을 방문하고 매천사와 유물전시관을 둘러보고 유품 전시를 협의했다. 초상화와 사진, 친필 서적 등 주요 유품 전시는 승낙을 얻지 못했고, 안경 나막신 화로 등 생전에 사용한 생활용품 10종만 허락을 얻었다.
선생이 1907년에 세웠던 신식 학교인 호양학교 동종 역시 후신인 방광초등학교에서 내어주지 않았다. 기대를 걸었던 주요 유품 일부를 복사본이나 사진으로 대체할 수밖에 없었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매천 학술 세미나’를, 구례에서 ‘매천 백일장’을 기념 사업으로 준비했다. 광양에서는 유품 전시와 ‘매천 황현의 역사의식과 문학’ 세미나, 추모 백일장을 준비했으나 무언가 허전했다. 모처럼 하는 기념 사업에 한 방이 필요했다. ‘조선조 마지막 선비’의 극적인 순절 장면을 담아내는 연극을 기획했다. 연극협회 광양지부에 의해 매천 황현의 일대기를 다룬 연극 ‘빈 하늘 한 점 별’이 무대에 올려지게 되었다.
그때 지역의 연극 단원들이 고생이 많았다. 기념사업비 예산이 추경예산으로 편성되는 바람에 연극을 준비할 기간이 모자랐고, 선생의 삶이 꼿꼿한 선비의 일상이라 극적인 요소를 찾느라 애를 먹었다.
세미나에 이이화 선생 모셔
‘매천 황현의 역사의식과 문학’ 세미나에 이이화 선생을 모신 일화도 빼놓을 수 없다. 딱딱하기 마련인 세미나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면 인기 있는 분을 모셔야 했다. 때마침 심취해서 읽고 있던 ‘한국사 이야기’ 작가인 이이화 선생을 모시고 싶었다. 출판사에 사정해서 집 전화번호를 알아내 전화했더니 사모님이 받았다. 선생님은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한국사 이야기’를 매년 한두 권씩 내느라 집필에 몰두하는 중이었다. 사모님 말씀이 선생님은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3년 전에 돌아가신 이균영 교수 이야기를 꺼냈다.
“이균영 교수님이 살아생전에 이이화 선생님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찾아뵙고 싶습니다.”
이이화 선생이 역사문제연구소 소장을 할 때 이균영 교수가 부소장으로 함께한 인연을 알고 있었기에 들먹인 것이었다. 그러자 사모님이 즉각 반응을 보였다.
“아, 안됐어요. 훌륭한 분이었는데. 문간채에서 집필 중인 선생님이 식사하러 오시면 말씀드려볼 테니 내일 다시 한번 전화 주세요.”
며칠 후 은장도 선물을 가지고 구리시 아차산성 아랫마을로 이이화 선생을 찾아뵈었다. 선생은 이균영 교수와의 정리를 생각해서 특별한 외출, 광양 나들이를 승낙했다.
오동나무 아래서 매천을 생각하며
문화인물 기념 사업을 준비하면서 내친김에 매천 선생을 제대로 알고 싶어졌다. 매천야록과 오하기문을 사서 읽었다. 선생의 저서를 읽으며 벼슬을 마다하고 초야에 묻힌 선비의 나라 사랑 마음, 지위고하를 막론한 거침없는 직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시골 풍경과 농부의 삶을 노래한 선생의 시에선 따스함도 느꼈다.
불현듯 선생의 발자취를 차분하게 더듬고 싶어졌다. 봉강 하조마을로 가서 선생이 어린 시절부터 스승인 왕석보를 찾아 넘었을 새재(조령)를 올려 보았다.
그리고 선생이 16년 동안 살았던 구례 간전면 만수동으로 향했다. 선생은 29세인 1883년 특설 보거과 초시에 장원을 했으나, 시험관이 보잘것없는 시골 사람이라며 2등으로 떨치자, 벼슬을 마다하고 낙향했다. 그리고 3년 후에 구례로 이주하여 만수동 오동나무 집에서 매천야록과 오하기문을 쓰며 16년을 보냈다.
1998년 당시 만수동 집터에는 풀이 무성했고 오동나무만 언덕에 우뚝했다. 언덕 아래에는 물이 흘러나오는 작은 샘이 있었다. 오동나무 그늘에 반나절 동안 앉아 구례 벌판을 바라보며 선생의 입장이 되어보았다.
매천 황현의 만수동 편지
북풍받이 산골 마을 만수동 꼭대기 집
오동나무 아래에서 나는 보고 들었노라
귀신 나라 미치광이 짓들을
간교한 정신의 횡행함과 간악한 무리의 방자함을
고약한 인심과 똥 내 나는 심보들을
조막만한 얼굴에 쏠린 눈동자 가졌다고
삐딱한 눈매로 흘겨보지 말 것이
내 본시 반듯한 눈매를 가졌었거늘
득실거리는 때 귀신 미치광이 짓 보다못해
동공의 쏠림이 있었노라
기울기 심한 세상 똑바로 쏘아 보다
눈자위 물러터지고 삐뚜름 되었노라
남원 구례 벌 넘어오는 소소리 바람
온몸으로 버텨내다 뼛속 마디마디
늦가을 된서리 무 바람 들었노라
강 건너 덩치 큰 산 울음소리 듣다듣다
창자가 삭았노라
내 오늘 산야에 묻힌 몸이
세상 꼬락서니 하 우스워 몰래몰래 기록하다
피 울음 울며 써 내리다가 몇 자 적어 띄움은
이담 세상 사람들은 정신 줄 똑바로 챙겨서
시도 때도 없이 불어닥치는 미친 바람
너끈히 받아넘기길 소원함이라
기울기 심한 세상에서 강단진 매무새와
꼿꼿한 눈매 고이 간직하길 소원함이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일백 년쯤 후에는
심지 곧은 공직자들 방방골골 제자리에 들어앉고
눈매 반듯한 젊은이들 빼곡히 들어차서
제대로 된 나라 꼴 한번 세워주길 바람이라
(민점기 시)
구안실과 일립정 복원
이 글을 쓰기 위해 구례를 다시 찾았다. 선생에 대한 광양의 자취는 이회경 회원이 서석마을 편에서 다뤘기에 구례의 자취에 집중키로 했다. 선생이 8년을 살았던 광의면 월곡마을의 매천사는 그대로인데, 매천사 앞 유물전시관은 문을 닫았다. 마을 아래, 돌아가시기 3년 전에 세운 호양학교의 후신인 방광초등학교에는 지리산 청소년수련장이 들어서 있었다.
구례군에서 이름 지은 ‘구안실길’을 따라 27년 만에 만수동 선생의 옛 집터를 찾았다. 언덕 위에 서있던 아름드리 오동나무는 사라졌고 선생의 집터로 보이는 곳엔 자그마한 농장이 들어서 있었다. 오동나무 언덕 아래 개울가에 작은 샘은 돌로 높이 쌓아져 ‘매화샘’ 이란 이름을 얻었다.
2022년 구례군은 샘물이 흐르던 개울을 메우고 축대를 쌓아 길쭉한 공간의 집터를 마련했다. 그리고 ‘구안실苟安室’(편안함이 족한 집) 현판이 걸린 삼 칸 기와집과 삿갓 모양의 정자 ‘일립정一笠亭’을 지었다. 마당 입구에서 샘 쪽으로는 선생이 사용했던 벼루 모양으로 기다랗게 담장을 쌓았고, 그 담장에 선생의 일대기와 ‘구안실 이야기’를 새겼다.
또한 마당 곳곳에 선생이 자주 대하며 친애했던 소나무, 감나무, 뽕나무, 오동나무, 국화, 석류 등 열다섯 가지 꽃과 나무를 심고, 그들을 노래한 시 원식십오영園植十五咏 표지판을 세웠다. 그중에 한 편, 선생의 오동나무 시를 소개한다.
원식십오영園植十五咏 – 오동나무
내 집이 시골 마을 맨 위에 있어서
높은 곳에 사니 산 깊은 줄 모르겠다
십 리 밖에서도 지붕이 보이니
마치 구름 속에 산봉우리 드러난 것과 같아
결국은 은둔하려는 뜻과 어긋나
도리어 사람들에게 찾기 쉽게 하였구나
누굴까 예전에 오동나무를 심어서
서쪽 뜨락에 그늘을 드리우게 한 이가
쭉쭉 해마다 자라나서
방에 가득 짙은 그늘이 들어온다
멀리서 볼 수 없게 가려 줄 뿐만 아니라
겸하여 뜨거운 햇살을 막아주기도 한다
심은 이가 참으로 신통력이 있어서
올 사람 마음을 미리 맞힌 것이 아니랴
(매천 황현 시)
초상화와 사진 보물 지정
조선의 마지막 선비이자, 근대 지식인인 선생의 초상화와 사진은 2006년 보물 제1494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2019년엔, 고종의 즉위부터 1910년 경술국치까지 47년간의 역사를 소문이나 세평까지 가감 없이 편년체로 기록한 책인 매천야록,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내용을 풍부하게 담고 있는 오하기문, 절명 시첩과 장원급제 교지, 안경과 향로 합죽선 등 생활유물, 벼루 필통 등 문방구류 등 총 35점이 국가등록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또한 2025년 8월에는 광양 서석마을에 있는 선생의 생가와 묘소가 전라남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선생의 나라 사랑 마음과 올곧은 역사 비평 정신이 뒤늦게라도 인정받게 되어 기쁘다. 끝으로 선생의 절명 시를 소개한다.
난리를 겪다 보니 백발의 나이가 되었구나
몇 번이고 목숨을 끊으려다 이루지 못했도다
오늘날 참으로 어찌할 수 없고 보니
가물거리는 촛불이 푸른 하늘을 비추네
요망한 기운이 가려서 임금 별자리 옮겨지니
구중궁궐은 침침하여 햇살도 더디구나
이제부터 *조칙을 받을 길이 없으니
구슬 같은 눈물이 종이 올을 모두 적시네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구나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날 생각하니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구나
일찍이 나라를 지탱하는데 조그마한 공도 없었으니
단지 인仁을 이룰 분이요 충忠은 아닌 것이로다
끝맺음이 겨우 윤곡尹穀처럼 자결할 뿐이요
당시의 진동陳東처럼 의병을 일으키지 못함이 부끄럽구나
(매천 황현 절명 시)
*조칙 : 대한제국 시절 왕이 내리는 명령으로 일반인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각 시군에 공문으로 보냈다. 매천 선생은 이 조칙 공문을 통해 나라가 돌아가는 상황을 기본적으로 파악했다.
글·사진–민점기 광양문화연구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