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이 올라야 멀리 볼 수 있다 -암서와 탐방기-

김세광(수필가)

2025-11-16     광양시민신문

예로부터 봉황이 깃든다는 비봉산은 언뜻 평범한 산인 듯했지만, 슬하에 봉강, 봉계, 상봉, 하봉 등을 거느린 다복하고 든든한 가장처럼 보였다. 게다가 해발 550미터에 이르는 훤칠한 키와 작고 뾰족한 얼굴은 영락없는 호남형이었다. 언젠가 정상 가까운 곳에 예로부터 한 선비가 학문을 연마했던 넓은 자연 암굴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암굴 안에는 사계절 물이 솟고 종종 호랑이가 다가와 글을 읽는 그를 지켜주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나의 궁금증을 키웠다. 몇 해 전에는 친한 후배들 몇 명을 이끌고 멋진 암굴을 보여주겠노라 의기양양하게 나섰다가 허탕을 치고 되돌아왔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내 딴에는 가까운 산이라 정상 부근에서 기웃거리다 보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암굴은 끝내 얼굴을 내밀어 주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그곳을 찾아나서고 싶었지만 위치를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최근까지도 비봉산 근처를 지날 때마다 내 눈은 암굴이 어디쯤에 있을지 여기저기 바쁘게 움직이곤 했다.

암 서 와

비봉산 꼭대기에 작은 암자 자리하고 있으니
거문고 노랫소리에 채지가(採芝歌)를 불러보네
숲이 깊어 대낮인데도 찾아오는 사람 없고
맑은 밤이면 외로운 책상 곁을 호랑이가 지나치네
풍진세상 벗어나 세상사 잊은 채 소요하니
넓고 깊은 가슴으로 강하(江河)를 삼키고 싶네

* 채지가(採芝歌): 나물을 뜯으며 부르는 노래, 일제강점기의 동학가사
지은이 : 박영모(솔성재 박정일의 넷째 아들)

암서와라는 자연 암굴은 원래는 지역 사람들의 기도처였다. 오래전 성씨 어머니가 자식을 낳게 해달라는 기도를 받고 태어난 박정일 선비(1775-1834)가 학문에 정진했고 돌아가신 후 당신의 영정을 봉안한 곳이기도 하다. 자라면서 어머니의 숨결을 느꼈던 탓일까? 그가 세상에 나오게 된 특별한 인연에 끌리듯 그는 암서와에서 심신을 수련하며 중용을 비롯한 많은 책을 읽으며 후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깊은 산속에서 홀로 학문을 하는 용기만으로도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 우연히 박정일 선생의 후손인 박형배(순천 수생당한의원) 원장 일행이 암서와를 간다는 소식을 듣고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음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구서마을 앞 다리를 건너 산업도로로 진입한 후 예전에 내가 지나쳤던 길의 반대편으로 접어드니 과연 암서와란 팻말이 보였다. 다시는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듯 진입로를 두 눈에 꼭꼭 눌러두었다.

광양문화연구회원과 후손 일행 9명은 한 줄로 서서 능선을 오르기 시작했다. 미지의 세계를 탐험이라도 하듯 일행들의 마음은 들떠있었다. 그러나 우리 앞에 나타나는 길은 생각보다 가팔랐고 키 큰 나무들로 울창했다. 선두에 선 몇 사람은 가위를 준비해 길게 자란 풀을 베거나 누운 나무들이나 낙엽 더미를 치우면서 뒷사람들의 통행을 도왔다.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위로 내딛는 다리는 무거워지고 여기저기서 일행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맺히는 땀방울은 이마와 등을 적셨고 올라야 할 언덕은 가슴을 무겁게 눌러왔다. 선비는 어찌 이런 험준한 산에서 책을 읽을 생각을 했는지 어떻게 오르내렸는지 그것만으로도 대단해 보였다. 암서와 까지의 거리는 짧았지만 나아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예상보다 길었다. 일행들은 말없이 한걸음 씩 옮기면서 가파른 경사와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다 왔다는 외침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붉고 노랗게 물든 단풍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는 사이로 돌연 거대한 암반 더미가 얼굴을 내밀었다. 산은 오르막길을 이겨낸 우리의 수고에 선물하듯 멋진 풍경을 보여주었다. 일행의 얼굴에는 함박꽃이 피었고 저마다 풍경을 담느라 바빴다. 단풍 속에 있는 암서와는 장엄했다. 위로는 큰 바위가 지붕처럼 펼쳐지고 빈 공간 사이 사이에 내민 바위들은 튼튼한 기둥이며 벽이 되었다. 바위틈으로 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다. 선비가 지내는 동안 마시던 물이었다.

넓은 바위에서 오랜 세월을 자라온 이끼들이 가을인데도 초록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거대한 이끼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풍경이었다. 바위로 흐르는 물은 단순히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키우고 사람을 키워 온 것이었다. 큰 바위 사이에 열린 공간으로 石扃(석경. 돌문)이라 쓰인 현판이 걸려있고 녹슬어 있는 작은 철문을 열면 巖棲瓦(암서와. 바위집)라는 현판이 보였다. 선비가 글을 읽었던 작은 방이었다. 일행들은 방 맞은편에 얼기설기 목재 기둥으로 지은 정자에 앉아 끝 간데없이 펼쳐진 산을 바라보았다.

가파른 산을 오를 때는 앞만 보였지만 암굴에 이르고 나니 평지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백운산 억불봉, 상봉에서부터 가까운 마을 뒷산에 이르기까지 속속들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실타래가 풀려가듯 길은 불규칙하게 이어지고 그 길을 따라 사람들과 차량들은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다. 새삼 인간의 욕망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높은 곳을 오르려 한 것은 더 멀리 더 많은 것을 보려고 한 때문일 것이다. 홀로 깊은 암굴에 눌러앉아 학문을 하는 것도 더 큰 세계, 더 넓은 곳에 이르려 하는 마음에서일 것이다. 박정일 선비는 저 먼 곳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시절에 꿈꾸었던 평안한 세계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는 평생을 유학에 종사하여 학행과 효행으로 많은 선비들의 귀감이 되었다. 그의 은사였던 강재 송치규 스승은 그를 가리켜 평생 중용 읽기를 즐겨했고 본성이 가장 중요한 도()라 여기어 그의 호도 솔성재(率性齋)라 지었다. 학문의 길을 걸어온 그의 영향을 받아서였는지 그의 후손들도 그의 길을 이어받았다. 상산 박씨 가운데 박희권은 거연정을 지어 학문을 논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고 광양향교에 광명학교라는 광양 최초의 사립학교를 세웠다. 또 희양십경으로 알려진 박현모는 양파정에서 글을 읽고 후학들을 키웠고 박영모도 많은 글을 남겼다. 상주 상산 박씨 가문이 내민 학문의 뿌리는 광양지역의 교육문화에 큰 기여를 했음이 분명하다.

암서와 난간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면 세상은 손바닥 안에 들어와 앉은 듯 작아 보였다.

백운산 기슭에 안겨있는 마을들과 그 속에서 사는 사람들, 여기저기 많은 길이 방황하며 살아온 흔적처럼 헝크러져 있었다. 내가 올랐던 봉우리들과 내가 걸었던 길, 내가 사는 집까지도 새롭게 보였다. 그곳에는 내가 아닌 또 다른 내가 보였다. 앞으로 나아가지도 그렇다고 진중하지도 못한 내 민낯이 드러나는 것 같아 부끄럽기도 했다. 보다 크고 넓은 곳을 향하려면 당장의 난관을 이겨내며 스스로 단단해지라는 외침이 들리는 것 같았다. 박정일 선비가 산속에서 학문에 정진할 수 있었던 것도 자신이 처한 위치에 대한 깨달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비봉산에 깃든 봉황이 암서와에 살았던 박정일 선비가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도 해본다. 옛날 봉강초등학교 학생들은 암서와에 올라 본 사람만이 어른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는 우스개 소리가 그럴싸하게 들렸다. 암서와를 바라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높은 곳에 올라 자신들이 살고있는 평지를 바라보며 무엇을 향해 살아가고 있는지 살펴보면 좋을 것 같다. 암서와란 곳이 단순히 학문을 했던 선비의 독서처가 아니라 꿈을 키우는 장소로 대중에게 가까워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