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암 이현일

5월에 광양에 이배된 이현일은 학문에 정진하면서 월파 서신구의 안내로 옥룡동 곳곳을 주유한다. 추동마을에 들러서는 고산 윤선도가 유배 후 해배된 곳이라는 것을 전해 듣고는 시 한 수를 지어 회포를 달랜다.

듣자니 왕년에 윤 시랑이
북방으로부터 남방으로 귀양을 왔다네
옥룡동에 향기로운 자취를 남겼으니
병오년이라 그 때에 광희가 있었어라
범을 쫒아 충성을 바치니 충성이 되려 누가 되고
매를 기른 건 지조가 되길 바라서이니 지조가 무슨 잘못이람
옳고 그름 어지러워 정해질 때가 없건만
우러러 하늘을 보니 해는 바삐 가는구나

이후 8월 15일에는 ‘옥룡사에 묵으며八月十五日夜宿玉龍寺)
’라는 시를 남긴다

晞陽縣北玉龍寺(희양현북옥룡사)
희양현 북쪽의 옥룡사는
道詵禪師昔創開(도선선사석창개)
도선 스님이 창건한 절이라는데
岩泉循砌響(암천순체향)
물소리 치는 바위폭포 섬돌을 돌면서 소리 나고
森森竹樹繞山栽(삼삼죽수요산재)
대나무 빽빽하게 산을 둘러 심어졌어라.
耽眷佛畵窮纖巧(탐권불화궁섬교)
너무 정교한 불화를 유심히 보고
仍喜禪房絶點埃(잉희선방절점애)
티 한 점 없는 선방이 몹시 좋아라
朔雪炎風多少苦(삭설염풍다소고)
찬 눈 더운바람에 고생이 많았는데
盪胸今日思難裁(탕흉금일사난재)
흉금 씻는 오늘 주체할 수 없는 상념

이현일은 선동마을에 자리한 송천사에 들러서는 서신구의 시에
답례한다.

이 몸 떠돌다가 대궐에 노닐던 당시
시끄러운 딱따기 얼마나 짜증스러웠나
남쪽으로 와 송천사에 이르니
산승의 세상 밖 이야기 듣는 게 좋아라

그가 옥동마을에서 8개월을 지내는 동안 마을 앞 농토는 갈암(葛庵)의 호를 따서 갈암(葛庵)뜰로 불리고 있으며, 그가 음용하던 우물은 314년이 지난 현재도 갈암정(葛庵井)으로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갈은리는 다압 외압마을로 밝혀져

갈암은 1698년 그의 나이 72세 때인 3월, 섬진강가에 자리한 갈은리(葛隱里)로 거처를 옮긴다. 서쪽 옥룡동에 역병이 창궐했기 때문이다. 갈암은 섬진강가 갈은리는 탁 트인 곳이라 유람할 만한 좋은 경치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동네 이름이 ‘갈은리’라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 이는 우연의 일치 때문이었다. 이현일의 자호(自號)가 갈암인데 섬진강가 마을 이름이 갈은리였으니 이 얼마나 기이한 인연인가.
그는 이에 대해 ‘남쪽으로 내려오니 우거하는 마을이 갈은이라 인간만사는 모두 미리 정해지는 것인가 보다’라고 읖조린다. 갈은리는 본지 취재결과 다압면 외압마을이며 마을 앞 평야 또한 갈운평 임이 본지 취재결과 최초 발굴하는 개가를 얻었다.

방환돼 정든 광양을 떠나다

그는 이듬해인 1699년 2월 4일 마침내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명에 따라 항동마을 앞 섬진강 나루를 이용, 정든 광양을 떠난다. 그러나 그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다음 호에 연재되겠지만 그의 애제자인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이 자신의 유배지와 아주 근접한 다압면 섬진마을 용선암(현재 최평규 박사 거주)으로 유배돼 온 것이다.
갈암 이현일은 17세기 조선의 대표적 지식인의 한 사람이다. 퇴계(退溪) 선생의 학통은 학봉(鶴峯) 김성일 선생, 경당(敬堂) 장흥효선생, 갈암(葛庵) 이현일로 이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을 만큼 성리학의 대학자이다.
다음 호에는 다압면 섬진마을에 유배 온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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