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문을 연 핫산 씨의 가게 '평창갈비'에서 오랫만에 웃음을 찾은 핫산 씨가 그의 든든한 후견인 임세란 씨와 포를 취했다. 비자 재발급 결정으로 근심 대신 미소를 머금은 그의 모습이 해맑다.
미스터 핫산(44), 그가 ‘평창갈비’라는 가게 문을 다시 열었다. 그의 아내 자밀라(39) 씨가 여수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뛰어내려 중상을 입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되자 닫았던 문이다. 사실 비자가 다시 발급되지 않았을 경우 다시 이 가게 문을 열 수 없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터미널 옆 한국신발 뒷골목에 그가 운영하는 ‘평창갈비’가 있다. 가게를 오래도록 비워둔 탓에 제법 드나들던 손님들도 많이 끊겼다. 하지만 최근 법무부 여수출입국관리사무소가 그들 부부의 비자를 재발급해 주면서 가게 안은 따스한 온기가 가득하다. 아내의 투신과 함께 잃어버렸던 웃음도 되찾았다.

특히 고향 모로코에 있는 누나의 친구이자 후견인인 임세란(52) 씨가 그의 곁을 든든히 지켜주고 있다. 평창갈비의 주메뉴인 갈비 등 음식을 준비하는 일에서부터 아직 서툰 한국말 때문에 손님들과 종종 대화가 막힐 때도 세란 씨의 도움은 여실하다. 아내 자밀라의 투신사건 이후 사태해결을 위해 누구보다 발 벗고 나선 것도 그녀다.

세란 씨는 “모로코를 여행하면서 핫산의 누나와 친구가 됐다. 그때 인연으로 핫산의 한국생활과 정착을 돕게 됐다”며 “한국사람과 한국을 좋아하는 핫산이 한국과 좋은 인연을 맺고 가게도 성공했으면 좋겠다”고 웃음을 매달았다.

핫산-자밀라 부부에게 시련이 닥친 것은 지난해 10월 7일. 모로코인 핫산 씨의 부인은 이날 오전 11시쯤 여수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출국 상담을 받던 중 5미터 높이의 2층 난간에서 뛰어내렸다. 이날 사고로 자밀라 씨는 양쪽 발목이 부러지고 허리를 다쳤다. 평생 하반신을 못 쓰고 살아야 할 위기에까지 치달을 정도로 심각한 중상을 입었다. 핫산 씨는 약 10년 전 처음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2001년 처음 한국 땅을 밟았고 2002년 한일월드컵 때 다시 한국으로 들어와 한국사람의 신명과 친절에 흠뻑 빠졌다. 무엇보다 한국인의 성실성에 감탄한 그는 이후 아예 한국 중고차를 해외에 수출하는 사업을 하겠다며 B-8(비즈니스 비자)비자를 받고 입국했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사업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궁여지책으로 여수에서 모로코 음식점을 차렸으나 역시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런 와중에 1년여 전 모로코 본국에 있던 아내까지 한국으로 들어왔고 약 6개월 전인 지난해 9월 터전을 광양으로 옮겨 ‘평창갈비’라는 음식점을 차렸다. 주변의 도움을 받아 어렵사리 차린 가게였다. 얼마간 지나니 손님도 제법 몰렸고 그는 재기를 다짐했다.

그런데 가게를 차린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여수출입국관리사무소로부터 갑작스러운 연락이 왔다. 상표법을 위반해 벌금형을 받았으니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하늘이 노랬다. 지난 2010년 겨울 고국인 모로코를 방문했다가 친구가 준 선물들이 문제였다.

악세사리 노점상을 하던 모로코 친구가 한국 친구들에게 주라며 준 가짜 명품 시계 30여 개를 갖고 들어왔고, 인천공항의 검색 과정에서 이것이 문제가 됐다. 전부 조잡한 플라스틱 시계여서 한국에서는 팔수도 없는 것들이었지만 그것이 시련의 시발이 될 줄 꿈에도 몰랐다. 법원은 결국 지난해 8월 12일 하산 씨에게 상표법 위반 혐의로 벌금 4백만 원을 선고했으나 그는 2백만 원 이상 벌금을 받으면 강제 출국 당한다는 고지를 전혀 받지 못했다. 가뜩이나 생계가 어려웠던 핫산-자밀라 부부는 이 벌금을 갚기 위해 새벽같이 일어나 폐지를 줍고 부부는 막노동과 식당 주방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처럼 어렵사리 돈을 모아 벌금을 다 갚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출국명령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부부는 지난달 22일 여수출입국사무소를 찾았다. 부부는 “광양에서 갈비집을 운영하고 있는데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개업한 지 한 달도 안됐는데 선처방법이 없겠냐”고 하소연 했지만 출입국관리사무소는 싸늘했다. 다만 사업을 정리할 시간 한 달을 더 연장해줬을 뿐이다. 그리고 7일 오전 11시 사무소 직원들과 후산, 신원보증인 등이 한눈을 판 사이 사무실 옆으로 난 작은 옥상 문으로 나가 5미터 높이의 난간에 잠시 매달려 있다 투신했다. 전 재산이 한국에 남은 상황에서 어떻게든 남아야겠다는 생각에 생명을 무릅쓰고 뛰어 내린 것이다. 자밀라 씨는 광주 전남대 병원에서 두 차례 허리와 발목 수술을 받았지만, 휠체어나 목발을 짚고 다녀야 할지도 모른다는 진단을 받았다.

임세란 씨는 “이렇게 열심히 사는 부부도 없었는데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며 “벌금을 나눠서 낼 수도 있는 방법도 있었을 테고, 항소하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외국인이라 우리나라 법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 같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핫산 씨도 “그때처럼 분노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며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한국사람은 따스했다. 그들 부부를 위해 시민단체를 비롯해 자밀라가 입원했던 전남대 병원, 여수제일병원, 여수 심병수 신경외과 등 병원들도 치료비를 탕감해 주는 등 앞장서 도왔다. 공동대책위원회도 구성됐다. 주승용, 김성곤, 순천 출신 민주노동당 김성곤 등 국회의원들을 비롯한 광양과 여수시의원 등도 함께 했다.그리고 마침내 여수출입국관리사무소는 16일 그들의 투자비자를 다시 재발급해주는 결정을 내렸다. 한국사람들의 끊임없는 요청과 후원, 지지가 마침내 얼음 같은 정부를 움직인 것이다. 그렇게 거센 파도가 물러간 뒤 식당에서 만난 핫산 씨의 가게는 아직 한산하다.

그는 “개업하자마자 한 달도 되지 않아 일이 터져서 장사는 엉망이지만 그래도 하나 둘 손님들도 늘고 있다”며 “이제 아내가 하루속히 나아서 함께 가게를 운영했으면 하는 것 빼고는 소원이 없다”고 말했다.

핫산 씨는 “사고가 났을 때는 한국에 대해 섭섭했지만 한국 분들이 도움을 많이 줘서 한국사람들에게 매우 고맙게 생각한다. 가게가 자리를 잡고 사계절이 있는 모로코와 비슷한 한국에 계속 머무르고 싶다”말했다.

그는 “광양제철소 등 기업회식도 가끔 있다”며 “광양사람들하고도 친하게 지내고 싶다”며 “한국 사람들처럼 열심히 그리고 성실하게 살아갈 테니 외국인 대하듯 하지 말고 지켜봐 달라”고 덧붙였다. 한국에 오래 머물 수 있고 장사가 잘 됐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을 말하는 미스터 핫산 씨, 이제 아내 자밀라 씨도 “영구장애일거라는 진단에도 불구하고 힘겹게나마 물건을 짚고 일어설 만큼 호전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하며 활짝 웃는다. 그의 ‘광양살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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