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레 퍼시픽 - 백성애 여사

누구나 가끔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이 있다.
내 삶의 무게는 얼마쯤일까?’

▲ 백성애 여사
이런 질문은 대체로 일상이 힘든 때, 즉 삶의 시련이 버겁거나 앞으로 나갈 길이 희미하여 보이지 않을 때 갖게 된다.

하지만 40여년 한 길만을 걸어 온 사람에게 위와 같은 질문은 사치가 아닐까?

지난 8일 아모레퍼시픽 새광양특약점(광양시 항만1323-6 2)에서는 특별한 생일잔치가 있었다. 1938년생으로 올해 만78세 백성애 여사가 그 주인공.

제철소가 들어선 금오도 태생의 백 여사는 결혼 후 서른다섯 살부터 삶의 무게보다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행상을 시작했다.

오늘날이야 방문판매나 카운슬러라는 그럴싸한 이름도 있고 남부럽지 않은 고수익을 올리는 사람도 있지만 70년대 비포장 시골 마을을 도는 보따리장사는 악착 같이 삶을 꾸려나가는 다부진 아낙네들이나 간신히 감당할 수 있는 어려운 일이었다.

광주에서 왔다는 기술자가 읍내에서 동동구리무를 직접 만들었어. 내가 그 양반 물건을 얼마나 많이 팔아줬는지 몰러

일제시대는 물론이며 해방 이후까지 변변한 화장품 하나 없던 시기 동동구리무는 뭇 여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을 터. 보따리에는 동동구리무는 물론이며 성냥 반짇고리 검정고무줄 등속이 가득했고, 교통 불편한 산골 마을 단골이 주문하여 어렵게 구한 물건도 그녀의 발걸음에 의지하여 배달됐다.

내 별명이 쇠꼬챙이여! 이렇게 작은 몸으로 머리에 두 말씩 짐을 이고 다녔응께

슬하 22녀의 자식 중 젖먹이 둘째부터 업고 다니며 장사를 시작했으니 그 고충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한 번 장사를 나서면 보통은 사나흘씩 시골 마을에서 숙박을 청했다. 다들 변변치 않은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밥이나 잠자리 걱정은 안하던 시절이었으니 그나마 다행.

이건 참 부끄러운 이야기인디. 애를 업고 다니다보니 나는 젖이 남아돌아. 젖이 돌지 않아 고생하던 집에서는 내게 젖동냥을 부탁해. 모처럼 갓난애가 실컷 배부르게 젖을 먹고 푹 잠을 자니 다들 크게 고마워했지갓난애가 있는 집은 그렇게 또 단골이 되고 잠자리를 해결할 수 있는 거처가 됐다.

당시에는 쌀은 물론이며 생보리 등 돈 되는 것이면 가리지 않고 받았으니 오늘날의 화폐보다 물물교환이 더욱 우선했던 시절이었다.

쌀은 당연하고 생보리까지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뭐든 받았지. 그 시절에는 광양장에 다니는 경운기가 있었어. 마을을 돌며 받은 곡식은 경운기에 부탁을 해서 장에서 받고 매상을 하기도 해서 돈을 샀지

외길 40년 광양에서 가장 나이 많은 화장품 방문판매 사원인 백 여사는 팔순의 나이에도 여전히 걸어다니며 영업을 한다.

아침 일찍 읍에서 나와 중마동 사무실에 들른 뒤 아파트를 돌며 단골을 만나

고객 관리 비법을 묻자 얼굴 붉히지 않고 말 옮기지 않고 들어만 주는 조심성이 필요해. 여자들이라 하고픈 속이야기를 털어놓는데 여기저기 다니는 우리 같은 사람이 함부로 말을 옮기면 안돼라고 말한다.

백 여사는 매월 350만원 이상 매출을 올리는 우수 사원으로 직장 내 동료들에게 존경의 대상이다.

조운성 새광양특약점 대표는 여사님은 광양 300여명의 카운슬러 중 단연 최고지요. 건강유지 비결이 곧 일이라는 생각으로 활동하시니 그 자체로 직원들에게 모범이 되고 있어요라며 한결 같은 부지런함과 건강유지를 칭찬했다.

나는 여전히 젊고 청춘이야!”

자식들에게 손 벌리지 않고 내 스스로 벌어서 생활할 수 있다는 보람이 제일 크지. 평생을 이 일이 아니면 나는 죽는다 생각하고 열심히 일했어. 앞으로도 두 다리 성하고 내 힘으로 걸울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일을 할꺼여라는 백 여사는 팔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젊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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