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비경과 가치 있는 문화유산

이제 막 만들어 온 두부가 상 위에 올랐다. 마을 주민들은 들에서 논에서 일을 하다 말고 마을 회관에 들렀다“. 막걸리나 한 잔씩 하고들 일 합시다” 막걸리 상을 차리는 항월 마을 서정순 이장(54)의 손이 바빠졌다. 한창 추수철이라 마을은 그 어느 때보다 분주했다.

옥룡면 항월마을 서정순 이장.

서 이장도 금방까지 일을 하다, 마을회관에 내가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고 황급히 달려왔다. 주민들과 둘러앉아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함께 새참시간을 가졌다.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자 햇볕에 그을린 얼굴이 드러난다. 동네에 들어오면서 본 감나무처럼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해맑은 미소가 마을회관에 주렁주렁 열렸다.

옥룡면 항월마을은 27가구, 70여명이 살고 있으며 마을주민 대부분은 주로 농사에 종사하고 있다.

벼, 콩, 팥, 감, 밤, 매실 등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고 있는데 과거에는 대규모 축산업도 행해졌다고 한다.

서 이장는“ 옥룡면에서 농사가 제일 많았어, 부촌 중에서도 부촌이었지. 그런데 한 30년 전이었을 거야. 갑자기 마을 축사에 키우던 소와 돼지에게 전염병이 와서 큰 손실을 떠 앉고 대부분이 폐사됐지. 그렇게 축산업에서 손을 땠어. 지금은 농사만 짓고 있는데 젊은 일손이 없으니 농사도 많이 줄어든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 마을은 대방마을에서 볼 때 길목 건너라해 본래‘ 목너미’라고 불렸다. 그 후 한문 식으로‘ 항월(項越)’이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

마을 입구에는 일제 강점기에 금을 캔‘ 왕금산’이 있는데 금 굴을 판흔적이 많이 남아 있으며, 그 곳은 이름처럼 지금도 금이 많이 매장돼 있을 것이라고 했다.

올해로 이장직 12년차, 서 이장은 옥룡면 최초 여자이장이다. 부지런함과 성실한 태도에서 마을 주민들은 무슨 일이든 믿고 함께한다.

주민 한 사람은“ 우리 동네 최초 여성이장이자 우리 면에서도 최초 여성이장이지. 마음씨도 착하고 어르신들도 잘 모시고. 이장 하는 동안 회관도 새로 짓고, 정각도 만들고. 부지런히 몸을 노대서 꽃밭도 가꾸고.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이장이야”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함께 자리한 노인 회장은“ 최초도 최초지만, 옥룡면의‘ 앞서가는 이장’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걸세. 요즘같이 농사일 바쁠 때도 마을 일이라면 불철주야 뛰어다니고. 항상 겸손한 태도로 노인들 잘 모시니 백점에 백점 더 얹어 주고 싶은 사람이야”라고 전했다.

이 마을에는 무엇보다 큰 자랑거리가 하나 있다. 고려 말기의 충신이자 성리학의 대가인 차원부(1320~1407)의 유문과 일대기를 엮은‘ 차문절공유사목판(전라남도 유형문화재 212호)’ 53판을 마을 내‘ 오천서원’에 소장하고 있다. 이 목판은 국가에서 판각을 명령해 국가기관에서 간행한 것으로 결판이 없고 보존상태도 좋아 서지학 및 인쇄사적으로 그 가치가 크다고 인정받았다.

이날 함께 자리한 연안 차씨 문중 문화재관리자 차길수 씨와, 서 이장과 함께 오천서원에 들렀다.‘ 차문절공유사’는 권두에 박종악의 구서(舊序), 권말에 이복원의 후서(後序)와 홍양호의 발문이, 상권은 유고(遺稿)로 시 2수, 이어 설원록(雪冤錄)으로 구성돼 있다.

차길수 씨는“ 운암 차원부는 고려 말기에 간의대부를 지냈고 정몽주, 이색 등과 함께 명성을 떨쳤던 유학자로 절의를 지켜 조선 개국 후 벼슬에 나가지 않아 죽임을 당했다.

특히, 설원록은 후에 그의 억울한 사실이 밝혀져 세조가 신원시켜 주고 문절(文節)이라는 시호까지 내렸다는 사실을 기록한 것. 그 중에서도 응제시 61수는 세조의 명에 따라 신하들이 문절공의 행적을 예찬하여 지은 글이다”고 설명했다.

현재‘ 차문절공유사목판’은 여러 개가 포개진 상태로 보관되고 있었는데 그는 이에 대해“ 가장 안타까운 것 중에 하나가‘ 보관’과 ‘보존’에 관한 사항이다. 대부분 목판은 세워서 보관할 수 있도록 보관대가 설치돼 있는데 이곳은 설계당시 그 부분이 고려되지 않아 현재처럼 눕혀 포개 보관할 수밖에 없다”라며“ 문화재를 보존해 후손에게 남겨 줘야할 의무를 가지고 있어 보관에 특별히 신경이 쓰여 관련부서에 몇 번 건의도 해봤지만, 이에 대한 개선이 없어 아쉽기만 하다”고 전했다.

아름다운 비경과 가치 있는 문화유산을 고이 간직한 항월 마을“. 임기가 몇 개월 남지 않았지만 좋은 일에 앞장서고 주민들끼리 서로 부족한 것은 보듬어 주고 채워나갈 수 있도록 노력 하겠다”고 말하며서 이장은 다시 일터로 나가기 위해 서둘러 장화를 고쳐 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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