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강현의 사소한 이야기 - 박강현 (사)한국해비타트전남동부지회 사무국장

은나라 초기에 중국 북방에서 일어난 흉노는 주, 진, 한의 삼왕조를 거쳐 육조에 이르는 200여년 동안 중국을 위협하는 가장 큰 세력이었다. 물론 흉노족이란 명칭은 중국인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이들에게 당한 굴욕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이름조차‘ 흉폭한 노예’라고 했을까. 중국을 상징하는 대표 유적인 만리장성의 시작도 바로 흉노족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흉노족은 북방의 초원에서 방목과 수렵으로 살아가는 민족이었기 때문에 겨울이 다가오면 월동을 위한 양식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들은 중국의 곡창지대를 침탈해 겨울나기를 준비해야했고 중국인들은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찌는(天高馬肥)’ 가을이 되면 두려움에 떨어야했다.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춘추시대 제나라에서 시작되어 전국시대에 들어와서는 연(燕),조(趙),진(秦)나라 등이 북방에 성벽을 쌓았다. 기원전 222년에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이렇게 쌓아진 북방의 여러 성을 보수하고 서로 연결시켜 만리장성을 완성했다. 그러나 한나라 무제 때 흉노족은 크게 패하여 세력을 잃게 되었고 이렇게 북방의 초원에서 밀려난 흉노족의 일파는 서쪽으로 세력을 뻗치게 된다. 흉노족과 중국의 악연 속에서 여러 가지 일화가 생겨났고 그중에서도 중국의 4대 미인으로 불리는 왕소군의 이야기는 한족의 수치가 어떠한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왕소군은 한나라 원제 때의 궁녀였으나 흉노의 힘에 굴복한 한 왕조가 친화정책을 위해 흉노왕 호안야선우에게 보낸 여인이다.

뛰어난 미색에도 불구하고 궁녀의 얼굴을 그리는 화공에게 뇌물을 주지 못했던 그녀는 단 한번도 황제의 부름을 받지 못했다. 가장 박색인줄 알고 보냈던 왕소군이 천하제일의 미색이었다는 이야기도 그러하고 만리장성을 넘으며 먼 고향땅을 바라보며 토해내는 탄식에 그만 기러기마저 날개 짓을 잊고 떨어졌다는‘ 낙안’의 이야기도 매시대마다 되풀이되는 세태를 담은 탓에 자주 이야기거리가 된다.

두보와 이백 등 당대의 시인들에게도 회자되었던 왕소군은 나약한 중국인들의 굴욕과 그것을 드러내 놓기에는 너무나 자존심이 상했던 중국인들의 자기위안의 또 다른 표현일 것이다.

중국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흉노족은 내부분열과 한족과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서쪽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이들의 진출은 또 다른 민족인 고트족의 치욕을 만들어낸다. 이들에게 패한 서고트족의 대이동은 훗날‘ 게르만족의 대이동’이라는 역사적 기록으로 남고 대로마제국의 흥망성쇠에까지도 영향을 미친다.

뛰어난 기마술과 궁술, 그리고 공성술을 자랑했던 흉노족에 대한 두려움으로 생겨났던 천고마비의 계절, 그리나 역사적 사실은 이제 굳이 기억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별반 의미 없는 일이 되었다. 그리고 천고마비는‘ 독서의 계절’이라는 말과 상통하며 풍요로움과 여유를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

책을 가까이하는 계절이 되면서 독서모임과 시낭송 등 많은 행사들도 기획되고 열린다. 그러면서 우리는‘ 책속에 진리가 있다’는 말을 떠올린다. 그러나‘ 아는 것이 힘’이고 책은‘ 만고의 진리가 담겨있다’는 우리들의 믿음 때문인지 책은 생각처럼 많이 읽히지도 많이 팔리지도 않는다.

동네서점들이 사라진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군자는 다섯수레의 책을 읽어야한다’는 말도 케케묵은 옛 얘기가 된지 이미 오래다. 한때 책은 엄청난 신뢰와 무게를 갖는 것이었다. 어떤 주장의 논거로써도 그렇거니와 일상생활 속에서 새로운 지식을 얻는 거의 유일하고 정통한 방식의 하나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날부터인가 책은 예전처럼 많이 읽히지 않는다. 그리고 책은 제일의 가치를 가진 소장품이 되지도 않는다. 쉽게 얻을 수 있으니 쉽게 버려지고 천대받기 십상이다. 그리고 책속의 진리라는 것도 의심받거나 부정되기 일쑤다. 그래서 혹자는‘ 책속에 진리가 있다’는 말 자체를 부정한다. 책속에는‘ 다른 사람의 다른 생각이 있다’고 한다.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다른 눈과 다른 생각이 있다는 새로은 접근방식은 책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뒤집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좀 더 들여다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책은 예전처럼 더 많이 읽히지도 않고 그 권위도 많이 상실되었지만 만들어지고 쏟아져 나오는 것은 더욱 다양하고 필자 또한 예전 같지 않다. 특정인과 자격을 갖추었다고 평가되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만들어지고 독점되던 책의 생산자가 바뀌었고 그 책을 대해는 사람들의 생각이 바뀐 것이다.

그래서 책은 이제 예전의 대단한 무게감을 내려놓고 너무나 친근한 모습으로 우리 옆에 와있다. 예전보다 훨씬 소박하고 살갑다. 그런 의미에서 책은 성서가 아닌 다음에야‘ 진리’라고 우기지도 않는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책과 더 가까워질 수 있다.

우리 이웃들과 같은 생각과 사소한 이야기들도 책으로 엮어지고 그 모양과 질감도 각양각색으로 만들어져 다가온다. 내 많은 이웃들과 대화하듯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천고마비의 계절의 뜻이 잔혹했던 역사적 사실에서 비롯되었으나 숱한 세월이 흐른 뒤 가을날의 풍요와 여유, 더할 수 없는 쾌적함으로 기억되듯 책에 대한 무게도 달라져 있다.

그래서 선선한 가을바람이 맨 살갗을 어루만지듯 부드럽게 우리의 삶과 생각을 어루만질 수 있는 책 읽기를 권해본다.

진리이기 때문에 외우고 따라해야한다는 마음의 부담감을 내려놓고 우리 이웃들의 그렇고 그런 이야기들과 다른 사람의 다른 생각을 들여다본다는 넉넉함으로 책한 권 읽는 것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또 다른 감성과 설레임을 줄 거라 믿는다.

세월이 하 수상하니 어디 책한권 제대로 읽을 시간과 여유가 있을까 마는 그래도 이 가을이 다가기 전에 내밀한 남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재미를 가져보는 것도 좋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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