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2월 9일까지 광양역사문화관에서…

한 지붕 아래 두 화가

“여수에서 밤낮으로 세탁소를 하면서 8남매를 길렀어. 그리고 37년 만에 내 고향, 여기 봉강으로 돌아왔지. 평생 일만 하고 살아서 그럴까. 막상 쉬려고 하니까 그것도 좀이 쑤셔야지. 집 안에 우두커니 앉아 아들을 기다리다가, 저~어기 사과 하나가 보여… 저걸 한 번 그려볼까. 달력 한 장을 뜯어다가 연필로 흉내를 내기 시작한 기라”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들은 누군가 그려놓은 빨간 사과 하나를 보았다.

▲ 90세 어머니와 아들의 아름다운 동행‘母子展'을 하고 있는 이현영 화가와 어머니 김두엽 할머니

‘이거 어머니가 그렸소?’

나이 드신 어머니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뛰어난 관찰력과 과감한 색채. 화가인 아들은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어떻게 한 번도 그림을 배운 적이 없는 어머니가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단 말인가?

아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어머니에게 스케치북과 색연필을 선물한다. 90살, 삶의 숙제를 모두 마친 내 어머니가 도화지에 펼쳐놓을 세상은 과연 어떤 모습일 것인가?

“마당에 핀 꽃도 그리고, 테레비에 나오는 유자도 그리고, 저 동산에 감이 주렁주렁 열린 것도 그리고… 그것 참 신기하지. 내가 봐도 매일매일 그림이 더 예뻐지는 기라. 고것 참 재미지지. 내가 끼니를 거르는 사람이 아닌데, 그 때부터 밥 생각도 잊고 마을회관도 나가도 않고 방바닥에 딱 붙어서 그림만 그렸어”

어머니의 그림이 한 장 한 장 쌓여갔다. 아들은 소중한 그 그림들을 모아 벽에 걸었다. 어머니의 그림은 안방 벽면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부엌 문짝에도 화장실에도 걸렸다.

어머니의 그림을 보고 있자면 20세기 마티스의 그림이 떠올랐다. 원색이 주는 힘과 순수함. 그것은 머뭇거림 없이 삶을 살아온 어머니의 당찬 발걸음을 닮았다.

또 하나의 특징은 서슴없는 보색 대비. 보통 입시교육을 통해 육성된 화가들은 보호색을 경계하지만 어머니는 그렇지 않았다. 관념이 없으면 없는 대로, 자신의 세계를 자유롭게 펼쳐놓았다.

그렇게 어머니는 90살에 화가가 되었다.

‘90세 어머니와 아들의 아름다운 동행’

이른 새벽. 아들과 어머니는 눈 뜨자마자 생각에 잠긴다. 아들은 마당 작업실에서, 어머니는 마룻바닥에서… ‘오늘은 무얼 그릴까나?’ 같은 생각을 품고 다른 그림을 그린다.

가는 선과 점을 이용해 모노톤의 그림을 그리는 아들은 때로 어머니 그림에서 영감을 얻는다.

물통에 떨어진 한 방울 물감처럼, 어머니의 진한 색채는 아들의 그림에도 조용히 물들어갔다.

쌓여가는 모자의 그림들. 아들은 문짝에 그림을 붙이다 말고 상념에 빠진다. 그런 아들을 보고 어머니가 보채듯 묻는다.

“오늘은 왜 그림 안 그리?”

“…어머니 나랑 전시회 한 번 할라요?”

무심코 툭 던진 한 마디가 어머니의 마음을 적신다. 그렇게 모자(母子)는 이제 막 물들어가는 9월의 끝자락에 멈춰 서서 첫 전시회를 열었다.

한 쪽 벽에는 어머니의 그림이 걸리고, 반대편 벽에는 아들의 그림이 걸렸다.

‘90세 어머니와 아들의 아름다운 동행’. 시민들은 그 길을 함께 걸으며 세월과, 사랑과, 축적된 삶과, 열정, 그리고 한 여자와 한 남자의 닮은 듯 다른 ‘세계’를 느꼈다. 그리고 그 여운은 꽤 오래갔다. 때문에 모자는 한 계절이 다 가기도 전에 두 번째 전시회를 열어야했다.

어머니의 달력은 날이 갈수록 얇아져 갔다. 색연필도 몽당연필이 됐다. 모든 것은 다 닳아가지만, 어머니의 그림에 대한 열정만은 매일 새롭게 피어났다.

“어머니, 그림도 좋지만 식사는 거르지 마셔”

직접 만든 나무 캔버스를 건네며 아들이 말한다. 유자를 그리던 어머니, 조용히 도화지 위에 글자를 얹는다.

“눈도 침침허고… 언제까지 그릴 수 있을까나… 안 해야지 해도, 돌아서면 또 심심하니 미치겄다. 또 그려야지. 그릴 수 있을 때까지 평생…”

어머니의 꼬부랑 허리가 뉘엿뉘엿 도화지 속으로 파묻혀간다. 오늘도 어김없이, 그림만 그리다 하루가 다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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