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시 성황마을 이야기

재개발로 인해 사라지는 성황, 오랜 역사속 마침표 찍어

성황 2교를 건넜다. 다리 위로 새마을운동이라고 적힌 초록색 천이 바람에 흔들거린다. 한때 사람들로 북적거렸던 이 동네는 언제부턴가 삭막함이 자리 잡고 있다. 뜯겨진 지붕 아래로 고스란히 삶의 현장이 남겨있다. 테이프가 칭칭 감겨진 의자는 쓸쓸하기 짝이 없다. 멈춰버린 시계바늘은 애석하기만 하다. 좁은 골목길에 정이 서려있는 동네, 누군가의 고향이 이렇게 사라져가고 있다.

▲ 성황마을 골목

성황마을, 광양군 골약면에 속해있던 지역으로 지명은 성황당(산신당)이 있었다는 데에서 유래됐다. 가장골, 대챗골, 독새밧골, 순짓골, 탑골 등의 골짜기와 고삽제, 물궁구리라는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고개들이 있는 동네. 고동바위와 미끄럼 바위 등의 바위가 사람들의 향기와 어우러진 포근한 동네였다.

▲ 까치슈퍼

때는 90년도. “아, 아,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장입니다. 오늘 오후 2시 까치 슈퍼 앞에서 명심이 엄마가 따 온 굴을 팝니다. 주민들은 필히 참석을…” 온 동네에 이장님 말씀이 울려 퍼진다. 일주일 중 유일하게 늦잠을 잘 수 있는 일요일. 낮밥을 먹고 낮잠을 주무시는 아버지 주머니 속에 손을 푹 넣는다. 달그락 소리가 나지 않게 숨죽이며 동전 몇 개를 몰래 움켜쥐고선 삼거리에 있는 ‘람보 오락실’로 향한다. 오락기와 손가락의 만남은 늘 유쾌하다. 레벨이 올라가는 그 짜릿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상기 너 이놈 빨리 집에 안 오냐” 땅거미가 내려앉은 마을 위로 고함 소리가 울린다. 아들은 바짝 긴장을 하고 집으로 달려간다.

▲ 람보게임장. 간판만 봐도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오락실 옆 왕헤어샾도 주말엔 손님맞이로 북새통을 이뤘다. 엄마와 딸, 어르신들 머리에는 분홍 플라스틱이 돌돌 말려있다. 공부 잘하기로 소문난 아들, 딸들이 유난히 많았던 골약 어르신들은 성황까지 와서 자식 자랑을 한다. “우리 아들 이러다가 장관하는거 아닌가 몰라” 하는 소리에 누구는 입을 비죽거리고 누구는 맞장구를 쳤다. 당시만 해도 개천에서 용나는 일이 많던 시절이었다.

▲ 김경심 어르신과 이미순 주임

동네와 도서관을 이어주던 졸졸 흐르는 냇가도 나이를 먹었다. 어릴 적, 이 동네 아이들에게 저 냇가만큼이나 깊은 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거머리가 무릎에 기어 다니는지도 모르게 피라미를 잡아 올리는데 정신이 팔렸었다. 따끔거려 무릎을 보면 핏물이 줄줄 흘렀다. 집에 가면 엄마는 혼내느라 진이 빠지고 아이는 우느라 진이 빠졌다.

하지만, 지금 성황은 진이 빠지는 울음도 혼이 나가는 웃음도 세월 속으로 사라졌다. 올해 재개발로 인해 이 마을은 사라지고 오랜 역사 속에서 이제 마침표를 찍는다. 이렇게 아이들이 뛰어 놀던 곳에는 높은 건물들이 올라온다. 동사무소 옆 골목길을 들어선다. 좁은 길옆으로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이 정겹다. 하지만 대문에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거나, 폐허가 됐다. 오랜 세월 동네 사랑방이자 식료품을 책임졌던 든든한 버팀목인 하나로마트도 31일자로 폐점된다.

이미순 하나로마트 주임(42)은 결혼 전 7년 쯤 근무를 했고 결혼을 한 후 작년에 하나로마트로 다시 발령을 받아 왔다. 총 8년을 함께한 셈이다. 이 주임은 “이 동네에는 친구의 어머니도 많이 계시고, 어르신들이 워낙 잘 챙겨줘 가족과도 같은 분들”라며 “따뜻한 정이 넘치는 곳이었는데, 폐점을 맞아 너무 섭섭하다”고 아쉬움을 전했다.

하나로마트를 사랑방처럼 여겼던 김경심 어르신(65)은 “이제 중마동서 만나면 되제~뭘”하고 한 마디 툭 던진다.

▲ 터만 남아버린 보배교회.

동사무소 옆 골목길 이층 빨간 집에 사시는 김경심 어르신은 이곳으로 시집와 41년을 성황에서 함께 했다. 좁은 동네였지만 아이들은 실컷 뛰어놀게 했다. 그야말로 정이 넘치는 동네였다. 까치슈퍼 문을 여니 달큰한 술 냄새가 풍겨온다. 한 할아버지가 주인 서영자(78)어르신과 아들 강대관(49)씨의 이야기를 안주삼아 술을 한잔 하고 있었다.

강대관 씨는 어머니인 서영자 어르신의 손톱을 다듬어주고 있었다. 난로를 사이에 두고 어머니의 손 매무새를 다듬는 아들을 보고 있자니 추운 한기가 싹 가실만큼 따뜻함이 전해져온다.

강대관(49)씨는 “고향이 사라진다는 것 자체가 마음 아픈 일”이라며 “여기서 나고 자랄 수 있어서 고맙다”고 말했다.

이제 성황마을은 다른 풍경으로 사람들을 맞이할 것이다.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렇게 사라질 성황, 오랜 세월 사람들의 삶이 되 주었던 곳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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