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북경에도 가을이 왔다. 사람들 옷이 가벼운 데 허리엔 긴팔을 둘렀다. 뜬금없어 보이는 코트도 보인다. 하늘엔 구름한 점 없다. 바람이 시원하다. 사진으로는 표현될 것 같지 않아 휴대폰을 동영상모드로 전환했다. 짐은 자금성 근처에 있는 유스호스텔에 풀었다.

 

북경을 찾는 관광객들은 다니는 곳이 대부분 정해져 있다. 1일차 코스는 천안문광장과 자금성이다. 시간이 된다면 자금성 후문에 있는 경산공원으로 이어진다. 이후엔 십찰해(什刹海, 스차하이)호수 근처에서 오래된 뒷골목인 후퉁(胡同)투어를 즐긴다. 자전거 뒷자리에 앉아 중국인들이 오랫동안 살았던 또는 살고 있는 복잡한 골목을 이리저리 다니는 것이다. 중국은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이런 골목들이 많다. 북경 후퉁의 경우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개최하기위해 도시정비라는 이름으로 많이 헐려버렸다. 지금도 3,600여개 정도의 후퉁이 남아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갈수록 줄어드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사람들이 이곳을 많이 찾는 이유는 패키지여행에 들어있기도 하지만 중국인이 어떤 곳에서 살

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다. 그러나 궁금증은 여기서 멈춰야 한다. 후퉁 투어는 단순한 관광 상품이지 그 이상을 보여주지 못한다. 차라리 천천히 걸으면서 호흡해야 중국인들의 말이 들리고 서성거려야 그들의 일상이 눈에 들어온다. 후퉁은 우리에겐 관광지이지만 현지인들에게는 열악한 주거 환경 탓에 벗어나고 싶은 지역일 뿐이다.

 

나는 북경에 들를 때면 798예술구(798)를 잊지 않고 찾는다. 언제부턴가 이곳에 들리지 않으면 북경에 다녀간 것 같지가 않아서다. 자전거와 사람들로 북적이는 십찰해나 경산공원과 달리 798은 찾는 사람은 많아도 조용하고 한적한 곳이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특별한 공간이 있듯이 798은 내게 그런 곳이다. 그래서 일정 중 하루는 반드시 이곳에서 시간을 보낸다.

 

798은 찾아가기 번거롭다. 북경중심에서 외곽으로 나가야 한다. 한국 사람들이 몰려 사는 왕징(望京)에서 가깝지만 이동의 편리함 때문에 매번 숙소를 자금성 앞에 잡는 나로서는 1시간 이상 움직여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목적지로 향하는 401번 버스를 타기위해 지하철 2호선 전문(前文)에서 버스터미널이 있는 동직문(東直門)으로 이동한다. 401번 버스는 시내를 벗어나 북동쪽으로 시원하게 내달린다. 하차는 따산즈 루코우난(大山子路口南). 맞은편에 798예술구 남문이 있다. 바로 건널 수 없으니 남문을 바라보고 왼쪽으로 100m이동해서 횡단보도를 건너야 한다. 버스 하차 후 ㄷ자로 걷는 것이다.

 

798은 모든 게 자유다. 길을 잃고 골목을 헤매도 상관없다. 그냥 즐기면 된다. 맛있어 보이는 음식점이 나오면 무작정 들어가 주문한다. 가격 부담도 적다. 피자는 12인치가 8천원을 넘지 않는다. 맥주와 함께 노천카페에서 운치를 즐기기에 딱 좋다. 작품구경도 하고 사람구경도 한다. 원하는 곳에 카메라를 대면 그림이 나온다. 798을 찾은 한국 관광객 구경도 재미있다. 구수한 사투리를 북경에서 들을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다. 한국 특유의 울긋불긋한 아웃도어 행렬은 이곳에서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딱히 입장료가 들지 않기 때문에 여행사 패키지에 798은 단골코스다.

 

798은 북경 주변 공장지대였다. 조양(朝陽)구에 위치하며 면적은 약 60여 만 ㎡이다. 원래 이곳은 1954년 구소련과 동독의 지원 아래 세워진 군수무기 공장으로 중국의 공업화를 대표하던 지역이었다. 당시 중국공산당은 국가의 주요시설인 중공업 공장이 외부에 노출되지 않도록 공장 이름대신 700, 706, 707, 718, 751, 797, 798 공장과 같은 일괄 번호를 부여했다. 공장들은 정부에 의해 외부로 옮겨지고 이 일대에 새로운 전자타운이 조성될 계획이었다. 정비를 위해 공장을 비우기 시작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더 좋은 곳이 되었지만 2000년대 초반만 해도 개발 붐이 일어나 어떻게 개발될지 모르는 곳 중 하나였다.

 

798은 2000년대 초반 많은 예술가들이 임대계약 통해 예술 공간을 조성하고 대외 행사를 개최하여 주목받기 시작했다. 공장을 더 외곽으로 옮겼을 뿐 중국정부는 이곳에 특별한 계획을 세운 것 같지 않다. 만일 그랬다면 거대한 공사판으로 변해 있어야 할 이 곳에 자유로운 영혼들이 몰려들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후 중국정부와 베이징시정부는 2008년 올림픽 준비를 위해 이곳을 '시급(市級)문화창의 산업지구'로 지정했다.

 

오래전 찍었던 다큐멘터리를 보면 798거리는 전형적인 중국 농촌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영상은 공장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젊은 예술인들의 일상을 보여준다. 먼 곳의 식료품점에 다니던 그들은 자전거에 검은 봉투를 매달고 힘겹게 페달을 밝았다. 봉투에는 음식이 들어 있었고 비포장 도로위로 개들이 뒤따랐다. 이렇게 가난한 예술인들이 정착한 798은 오래지 않아 미국 <타임>지 선정 22개 세계도시 문화예술센터 중 하나로, 미국 <뉴스위크>지 올해의 지역 12위로 선정됐다. 모두 2003년도 일이다.

 

다시 들른 798은 여전히 조용했다. 바뀐 작품들도 있었고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는 조형물도 있었다. 새로운 것이라면 현대 모터 스튜디오가 이곳에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스튜디오 건물에 그려져 있는 입체적인 그림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관계자에게 물어보니 현대차는 중국 고객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하기 위해 현대 모터스튜디오를 총면적 1,749㎡(약 529평) 규모로 조성했다고 한다. 정식개관은 2017. 11. 1일 이지만 임시로 운영 중이었다. 798에 이런 대기업 스튜디오가 들어섰다고 이상할 것은 없다. 글로벌 자동차회사인 폭스바겐과 아우디는 서비스센터와 기술연구센터를 진작부터 798에 넣어두었으니 말이다.

 

798은 이벤트가 다양하다. 자동차회사의 차량홍보전시가 있는가 하면 패션쇼도 열린다. 결혼식 웨딩촬영 장소로도 인기가 좋다. 내가 방문한 시점에 2017년 798예술제(아트페스티벌)가 열리고 있었다. 다양한 작품만큼이나 사람들도 붐볐다. 798을 789로 했다면 이상했을 것이다. 치빠지우(789)는 서유기의 등장인물인 저팔계의 쭈빠지에(八戒)와 발음이 비슷해서 별로다. 치빠지우(789)보다 치지우빠(798)가 발음이 경쾌하다.

 

1997년 중앙미술학원 조소과 교수가 공장의 한 켠을 임대해 시작한 798의 역사도 그 한계가 보이기 시작한다. 카페, 레스토랑 등 대기업 프랜차이즈 점이 늘어나고 있다. 예술지구에서 상업중심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뭐든 영원한 것은 없다. 다만 천천히 바뀌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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