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바퀴 아래서’를 읽고

▲ 김시은 영선중학교 3학년

‘교육’이란 지식이나 기술을 가르치며 인격을 길러주는 것이다. 주로 학교나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학생에게 필요한 지식 또는 본인이 배우고자 하는 것을 그 분야에서 박식한 이로부터 교육 받는다. 보통은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을 가르치는 것으로 간주하는데 우리나라에서의 교육은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 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이 배우는 것은 ‘경쟁’이고, 그들의 인격은 배제된 채 성적을 높이기 위한 교육이 우선되고 있다.

학생들은 더 높은 등수를 꿰차기 위해, 옆자리의 친구보다 더 뛰어난 평가를 받기 위해 해선 안 될 행동을 할 때도 있다. 그 치열함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대한민국의 학부모들은 자녀들을 다른 집 자식보다 더 비싼 과외, 학원을 보내려 노력한다. 그런데 선택에서 학생의 의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때가 많다. 자녀가 진정 배우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 함께 고민하는 일은 뒷전이고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일에 집중한다.

이런 식의 부모 주도식 교육 방식은 학생들에게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최소한의 의사를 확인할 때도 있지만 이미 정해진 길로 나아가는 게 대부분이다. 학부모와 학생 모두 바람직하지 않은 방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과감하게 자신들의 의지대로 밀고 나가지 못하고 주변 사람들의 교육 형태를 답습하며 그 길에서 갈등하고 방황하는 경우가 많다.

‘수레바퀴 아래서’의 한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신학교에 입학한다. 밤낮으로 공부하여 주 시험에서 2등으로 합격하고 마을의 인재로 촉망받는다. 분명 그는 비상한 두뇌를 가졌다. 학교에서 성적도 최상이지만 오로지 공부만 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아니 애초에 스스로 배우고 싶은 게 뭔지 생각해 볼 기회조차 없었다. 한스는 아버지와 지역 사회의 인사들이 권하는 길로만 갔고 공부하는 데로만 따랐으며 그 과정에서 스스로 생각한 것을 이야기 하거나 이견을 내본 적이 없다. 우수한 두뇌의 소유자답게 어른들이 가리킨 방향대로 최고의 신분을 향해 갔고 오로지 경쟁에 휩싸인 공부를 했다. 그에게 어른들이 설정하는 방향을 거부하고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용기와 자유는 없었다. 한스에게서 100년이 지난 현재 청소년들의 불안과 방황이 느껴져 씁쓸하다.

한스가 신학교에서 사귄 친구 하일러는 이와 같은 교육 방식에 반항적인 인물이다. 엄격하게 공부만을 강요하는 학교 규칙에 순응하지 않고 스스로 원하는 자유를 추구하며 그곳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가 진정으로 좋아하고, 원하는 것에 집중하는 인물이기에 한스는 하일러를 만나고 달라진다. 여태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자유에 두근거렸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한스의 성적은 떨어지기 시작하고 친구 하일러는 결국 퇴학에 이르게 된다. 절대적인 학교의 힘에 반항한 결과였다. 한스 또한 스스로의 추락으로 인한 괴로움에 못 이겨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고 촉망받던 그에게 마을 사람들은 더 이상 시선을 주지 않았다. “지치면 안 돼. 그러면 수레바퀴 아래에 깔리게 될지도 모르니까” 외쳐보지만 그는 지쳐있었다. 지난 시절동안 무얼 위해 노력해왔는지 알 수 없었고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지쳐선 안 된다. 누구보다 뒤쳐져선 안 되고 항상 앞으로 나아가야 이기고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 체제는 개개인의 개성과 창의성을 짓밟기에 충분하다. 정해진 틀 안에서 똑같은 내용을 교육 받고 시험 성적으로 학생의 등급을 매기는 체제에서 진정한 교육의 본질에 다가설 수 없으며 배움 또한 진전이 없다.

학생들은 그저 공부하는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우리나라 교육은 진정한 교육의 목적에서 방황하고 있다. 교육은 배우는 사람의 입장에서 바라봐야 한다. 원하는 교육이 무엇인지, 무엇을 목적으로 배우고자 하는 지에 집중해야 한다. 부모의 욕심도, 이기적인 권력자들의 포퓰리즘이 작용해서도 안 된다. 학생들 스스로 흥미를 가지고 비판 의식 아래 자신만의 진로를 찾아간다면 숨 쉴 수 있는 미래가 펼쳐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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