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문화, 가사歌辭로 노래하다

▲ 백숙아 문학박사

매화랑 진달래랑 갖가지 야생초가
다툼 없이 피어나 세상 향해 손짓하니
백운산 자락에 묻힌 올곧았던 선비 찾아
설렘과 떨리는 맘으로 발길을 옮겨본다
명산으로 꼽히는 백운산 세 정기 중에
북두칠성 정기 타고난 명품선비 신재 선생
조선 중기 기묘명현 21인으로 이름났으니
올곧은 그 성품에 백운산 정기 배어서였을까
조선 중기 정암 조광조랑 적폐청산 외치다가
화순으로 귀양 가서 쉰셋에 승천했다

전라남도 광양시 봉강면 부저리에서
부친 한영과 모친 청주한씨의 장남으로 태어나
경서經書를 가까이하며 성현의 삶 법으로 삼아
수행하기에 열심이었던 명품선비 신재 선생
8·9세 때〈영우두詠牛頭〉·〈영오詠烏〉라는 한시 지어
세상을 놀라게 한 광양의 신동이었지
15세에《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80권을 품에 안고
좁은 석굴에 들어가 2년 동안 천 번 통독
해석이 끝나고야 석굴 문을 나섰다
당시에 사림 종장으로 추앙받던 김종직 제자
한훤당 김굉필이 순천 북문 근처에 유배오자
그의 처소 드나들며 학문수업에 몰두하여서
생애에 가장 깊은 학문세계 완성하고
37세 기묘년 9월에 의정부 사인에 오르자
기묘사화 일어나고 적폐청산 외쳐대다
조광조와 함께 했던 스물세 명 화禍를 당하니
신재 선생도 삭탈관직 화순 동복으로 유배되었다
14년간 유배생활 끝난 뒤에도 동복에 남아
쟁쟁한 문인이나 학자들과 교유하며
기라성 같은 하서 김인후, 석천 임억령, 미암 유희춘 등등
훌륭한 제자 육성에 온 정성을 기울였다
백발과 청춘이 둘러앉아 책을 보며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읊던 그 자리
나무 그림자가 기울고 해가 서산에 걸리는데도
백발 문장 읊어대니 저물녘 새도 지지대던
사제 간의 아름다운 시 읊는 그 소리
오백년 가까이 섬진강 따라 여전히 흐르는 듯
그의 문집 《신재집》에 실려 있는 문학작품
부賦 1편 한시漢詩 18수 편지 1편이 전부이다
그의 명성 그의 학문 호남인물로 꼽히면서도
일실되어 전해지지 않는 턱없이 작은 작품량
연구하는 학자로서 애석하고 안타까운 일
유가적 사상과 도학자적 입장에서
자연을 노래하고 세상을 노래했던
애민사상 충효사상 짙게 담긴 한시 작품
세계와의 조화와 인간 절제미를 추구했다

호남이 문향으로 자리매김 하는 데는
신재 선생 기여도가 여실히 드러나고
문장 또한 뛰어나서 호남인물로 손꼽히니
명실공이 해남 윤구와 담양 유성춘과 더불어
당시에 호남삼걸 기묘명현 역사인물이었다
그럼에도 세상 관심 여전히 소홀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신재 명성
후학들과 지자체의 무관심이 큰 문제
고금을 막론하여 광양을 대표하는
문인이자 정치가였던 명품선비 신재 선생
지역민들 태반이 신재 선생 누구인지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다는 건 슬픈 일이다
현대판 선비들의 잘못된 선입견이
민중의 귀를 막고 눈을 가린 탓일까
이제라도 정신 차려 바른 역사 바른 문화
아름답게 가꾸고 보존하는 일만이
알량한 선비양심 그나마도 지키는 일

★ 이 가사에서 석굴은 광양시 옥룡면 바위산장 건너 산기슭에 신재 선생이 공부했던 바위아래 작은 공간을 이른다. 지금은 바위 위에 정자가 세워져 유적지로 관리되고 있으며 ‘학사대’라는 글귀가 바위 벽에 보이는데 선생이 직접 새겼다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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