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군내버스. 이 한 장의 사진을 앞에 두고 참 많은 것들이 스쳐 지난다. 아프고 슬프고 고난스러웠던 날들이 풍겨내는 비릿한 향수 같은 것 말이다. 그나마 뚜렷하지 않고 잔뜩 흐려져서 상처보다는 흔흔해지는 그런 것들 말이다.

당시 버스에는 운전기사 말고도 버스회사 직원이 더 있었는데 바로 버스 안내양이다. 안내양은 어렸다. 대부분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고등학교조차 진학하지 못하고 생업 전선에 뛰어들어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슬픈 이름이다.

일찌감치 중학교를 졸업한 어린 여학생들은 산학연계가 가능했던 한일합섬으로 대표되는, 섬유단지가 집약돼 있던 대구로 타향살이를 시작하는 여학생들이 적잖았다. 버스 안내양의 처지로 이들과 다르지 않았다. 이 앳된 버스 안내양은 그러나 근무한 지 일 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산전수전 공중전을 두루 치러본 경험 많은 장수처럼 버스를 지휘하기 마련이다. “오라이” 안내양이 버스를 두어 번 두드리면 버스는 그 명령을 받아 그제야 출발했다.

군내버스는 운송수단이라는 이름보다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하게, 꽉 찬 사람들의 비릿한 땀, 그 퀘퀘한 체취가 먼저 떠오른다. 통학시간의 군내버스는 그야말로 발 한 틈 디딜 공간이 없었다. 더구나 읍내 5일시장이라도 서는 날이면 버스 안은 그야말로 전쟁 통이 따로 없었다.

짓눌려진 찐빵처럼 앞사람과 뒷사람에 협착돼도 버스 안내양은 아예 버스 밖으로 나가서는 버스 출입문을 지렛대로 삼아 들어서는 사람들을 짐짝처럼 차곡차곡 밀어 넣었다. 그리고 운전기사는 아예 출발 직후 급브레이크를 한번 밟아 줌으로써 다음 정거장 승객들을 위한 공간을 미리 준비하는 노련함을 발휘했다.

승객들은 누구나 사람들의 땀 냄새에다 벤또라고 불리던 학생들의 양은 도시락에서 품어져 나오는 시금털털한 김치냄새를 고스란히 감내해야만 했다. 어쩌다 얼큰하게 막걸리 잔이라도 한 잔 걸친 아저씨가 담배 한 개비라도 태울라치면 버스 안은 숨이 턱턱 막히는 화생방 훈련장이 따로 없다.

여학생들과 아줌마들이 쏟아내는 말홍수도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시골 장이란 게 물건만 사고파는 곳이 아니었던 지라, 오랜만에 만난 아주머니들은 집안 식구하나하나 안부에서부터 동네 어떤 집 마누라 바람 난 이야기까지 구연동화를 읽듯 늘어놓는 데다 여학생들의 가벼운 입은 드라마 연속극에서부터 그 잘난 총각선생님 눈짓 행동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조잘거림의 대상이어서 군내버스 안은 그야말로 사람과 언어의 북새통이란 말에 딱 맞아 떨어졌다.

그러나 사람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으나 또 그것을 불평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한 풍경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던 게다. 용케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학생들은 당연하게 서 있는 아이들의 가방을 포개 챙겨줄 줄 알았고, 서 있는 학생들도 그 일을 고맙거나 미안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버스가 비포장 도로 위를 흙먼지를 일으키며 덜커덩거리는 사이, 종점이 가까울수록 다소간 여유 공간이 생기고 그 틈에도 잠이 모자라는 사람은 또 졸기도 했다. 콩나물 같던 사람들이 하나 둘 뽑혀나가고 버스는 평안을 찾았다. 시름겹던 군내버스 고단한 안내양도 그제야 깊고 슬픈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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