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회복 추진위 “민주민족열사들과 함께 통일 염원하실 것”

지난 11일 항일독립운동과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주의를 외치다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사법살인을 당한 수암 최백근 선생이 마석모란공원으로 이장됐다. 수암 최백근 명예회복 광양시민추진위원회에 따르면 이날 망우리에 잠들어 있던 선생을 민족민주열사들이 잠든 곳인 마석모란공원으로 이장했다.

이장식에는 오종효 정의당 광양지역위원장 등 수암 최백근 선생 명예회복 광양시민추진위원회 회원들과 선생의 유족, 그리고 선생의 평생 동지들이 참석해 선생을 추념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한 지역위원은 “선생 홀로 외로웠던 망우리 묘소에서 수많은 민족민주열사들이 잠들어 계신 마석모란공원으로 다시 모셨다”며 “수많은 동지 곁에 모신 만큼 이제는 외롭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하늘에 계신 수많은 동지들과 통일을 얘기하시고 민주를 논하시고 계실 것”이라며 “무엇보다 정전협정을 대신해 종전을 선언하고 평화협정이 체결돼 남북의 모든 민족이 통일시대를 함께 누리는 꿈을 염원하실 것”이라고 덧붙였다.

수암 최백근 선생은 1914년 2월 20일 광양 골약면 태인도(태인동 도촌마을)에서 출생했다. 박정희 정권이 일으킨 5.16 군사쿠데타 당시 민족일보 조용수와 함께 22일 체포돼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그해 12월 21일 사형이 집행돼 사망했다.

남달리 의협심과 민족문제에 천작했던 1932년 보통학교 6학년때 광주학생운동의 소식을 접하고 이에 응원 동맹휴학을 주도한 혐의로 경찰에 연행됐다. 이 때 고문으로 한쪽 고막이 파열되기도 했는데 이것이 파란만장한 삶의 시작이었다.

그해 4월, 치안유지법 및 출판법위반으로 진주소년원에서 6개월간 복역했다. 1933년 광주고보(현 광주서중) 재학 중 한 교사의 주선으로 일본 와세다 대학에 진학했다. 그러나 재학 중 비밀결사 독서회사건으로 중도에 귀국했다.

서울외국어전문학원 졸업 후 비밀조직인 <전남지역 사회운동협의회 사건>으로 은거생활을 하다가 8·15광복을 맞았다. 그 뒤 서울로 간 그는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와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주도적인 활동을 펼치며 서울시 대표로 참여했다.

여운형이 주도한 중도좌파성향의 근민당에 입당한 선생은 성북구 부위원장과 당 중앙위원, 총무부차장으로 활동하던 중 1948년 이승만의 단정수립에 반대해 통일독립운동자협회의 실무비서로 큰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평양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하는 등 하나의 조국을 위해 헌신적으로 활동하던 중 이승만 독재정권 하인 1953년 9월 14일 북쪽의 밀파간첩혐의로 대구고법에서 징역2년을 선고받고 1955년까지 복역했다.

1960년 4·19를 맞아 활동을 재개하며 사회당준비위원회를 구성했고 민자통중앙협의회가 결성되자 바로 서울시협의회를 구성하고 사무국장을 맡아 활동했다. 한미경제협정 및 반공법 제정반대운동과 5·3일 남북학생회담 지지대회를 조직하는 등 민족의 자주적 통일을 위해 의욕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중도좌파세력의 중심에서 활동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1961년 5·16군사 쿠데타 후 22일 체포돼 군사 법정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12월 21일 오후4시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와 같은 시각에 집행되어 운명했다.

“사람이 사람을 억압해서는 안 되고 사람이 사람을 수탈해서도 안 되며 나라가 외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야 하고 분단된 나라가 자주, 민주, 평화적 방법으로 통일되어야 한다”

평소 수암 최백근 선생이 즐겨 쓰던 말이다. 그의 말이 그의 묘비명을 채웠다. 현재 모란공원에는 통일운동가였던 문익환 선생과 전태일 열사, 김근태 전 국회의원 등 민족민주열사가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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