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무엇인가. 인류가 지구촌에 처음 탄생한 이래 이 문제는 여전한 숙제 였을 것입니다. 아무리 잘 포장한다고 해도 종교와 철학의 의문부호의 출발점도 바로 죽음의 문제에서 비롯됐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겠지요. 석가가 말하는 윤회나 예수의 천국도 바로 이 지점을 절대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늘 날 과학계에서는 “한 생명체의 모든 기능이 완전히 정지되어 원형대로 회복될 수 없는 상태”라 규정하지만 죽음의 세계는 여전히 확인 불가능한 미증유의 세계로 남아 있습니다. 불안과 기대가 공존하는 아이러니 속에 음은 세계와의 단절의 성격이 강합니다.

그래서 실체가 없으니 물질적 현상이나 감각이나 표상이나 의지, 지식 같은 것이 있을 리 없고 보고 듣고 맛 본 바가 없으니 늙음과 죽음이 있을 수가 없다. 삶이곧 죽음이요, 죽음이 곧 삶이라, 처음부터 생사가 구별이 없다는 반야심경의 구절은 가끔 산 자가 품고 있던 일말의 불안함에 의지가 되어주기도 합니다.

또 공자는 “삶에 대해서도 모르거늘 어찌 죽음에 관하여 알겠는가”는 말로 죽음 이라는 문제를 두고 휘청대는 제자들을 꾸짖기도 했는데요, 삶을 알게 되면 죽음은 저절로 알게 된다며 타이르는 말입니다. 석가의 말과 공자의 말이 이렇게 다른듯 보여도 생사의 연함을 보는 관점이 결코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봄에 싹이 트고 여름에 자라고 가을에 열매 맺으며 겨울에 땅속으로 사그라져 다시 찾아올 봄을 위한 양분이 되는 게 세상 이치이고 보면 사람의 세상살이도 이 세상 이치에서 크게 어긋나는 법이 없습니다.

아마도 우리 조상들도 죽음의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장례 풍습을 가만 지켜보면 애도와 격려, 그리고 슬픔을 애써 삭힌 흥겨움도 함께 한 자리를 차지했으니 말이지요.

어찌 보면 상가집에서 웃음이 흘러나온 다거나 큰 소리가 나는 일이 고인이나 유족에게 큰 실례가 될 법도 한데 우리네 장례풍경은 슬픔에 겨워 우는 사람 말리지 않은 가운데 웃는 이 역시 크게 탓하지도 않았던 게지요.

그저 장례를 지키는 게 고인을 잘 보내는 길이며, 그 곁을 지켜주는 공동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남아있는 유족에게 힘이 된다는 사실을 오랜 경험을 통해 터득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어릴 적 만장을 들고 상여를 따라 장지 까지 동행했던 기억들이 다들 있을 겁니다. 제일 큰 만장이 맨 앞에 섰는데 그 만장은 꼭 덩치 큰 형님들 차지였지요. 저희땐 작은 만장은 500원, 큰 만장은 천원을 받았던 기억이 있는데요, 지금 생각하면 그게 망자의 저승길 노잣돈이었을 겁니 다. 망자의 저승 가는 길에 동행했으니 고맙다는 뜻도 담겼을 겁니다.

가슴을 후벼 파는 구슬픈 상여소리도 떠오르네요. 메기꾼이 앞서 “북망산천이 머다더 니 내 집 앞이 북망일세”나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오실 날이나 일러 주오” 등의 구슬픈 구절을 선창하면 상여꾼들이 “너허 너허 너화너 너이가지 넘자 너화 너” 등의 구절을 받아 함께 넘겼지요.

상여는 집을 나서며 제 살았던 마을을한 바퀴 돌게 마련인데 망자가 하는 마지막 하직인사인 셈이었지요. 그제야 동네 사람들은 망자가 떠나는 마지막 길을 눈물로 전송했습니다.

또 장례를 끝마치고 마을로 돌아온 상여꾼들은 가끔 “이번 상여는 무거웠다”거나 “이번 상여는 가벼웠다”는 말을 내뱉 고는 했는데요, 그게 망자의 지닌 여한의 무게를 말하는 것임을 지금에야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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