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소풍에 대한 아련한 기억들을 갖고 계실 겁니다. 저도 소풍하면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는데요, 바로 500원 분실사건입니다.

때는 바야흐로 1979년 국민학교 1학년 때의 일입니다. 태어나 처음으로 봄 소풍을 가는 날이었습니다. 평상시에는 매일 3킬로미터 넘는 통학 길을 걸어서 학교에 다녔는데요, 주변에 조그만 냇가가 도란도란 흐르고 풀벌레와 새소리, 무엇보다 동네 친구들과 함께 가는 길이라 뭐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소풍 가는 그날은 이웃집 아저씨가 어쩐 일인지 경운기에 저희들을 태워주었습니다. 어머니가 새벽잠 설치고 일어나 6학년이 된 큰 형님과 3학년이던 작은 형님 그리고 1학년이던 막내까지 삼형제 위해 싼 도시락을 들고 함께 가는 길이었는데 아마 광양장에라도 가시던 길이었는지 저희를 태운 겁니다.

지독하게도 손재주 없던 아버지와는 달리 이웃집 아저씨는 손재주가 좋고 기계도 잘 다루었는데 시골 깡촌에 살면서도 누구보다 빨리 경운기라는 신문물을 받아들였습니다. 물론 이웃집 아저씨를 꿰어 내 당신 농사일을 시킨 아버지가 더 현명했던 것은 아닌지 판단하기 어렵지만 말입니다.

여하튼 처음 가는 소풍 길에 처음 타보는 경운기까지, 대여섯 명이 탄 경운기가 들판을 달릴 때 얼굴을 스치는 봄바람은 그지없이 싱그럽기도 했습니다. 더구나 생전 처음 500원 짜리 지폐가 바지 뒷주머니에 들어있기까지 했으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 행복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새겨진 500원 짜리 지폐는 당시 국민학교 1학년짜리 아이에게는 어마어마한 거금이었습니다. 국민과자 뽀빠이가 20원인가 50원인가 할 때니까 말입니다. 소풍 가서 사먹어야 할 솜사탕이랑, 알사탕에 쫀득이까지 눈앞에 아른거리는데 행복은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문제는 학교에 도착한 다음에 일어났지요. 삼형제가 모두 내리고 어머니와 이웃집 아주머니를 태운 경운기가 떠나려던 참이었습니다. 아무리 뒷주머닐 뒤져도 이순신 장군이 명확히 새겨진 500원 짜리 지폐가 만져지지 않았던 게지요.

국민학교 1학년짜리 사내아이의 머리는 순간 복잡해졌습니다. 돈을 잃어버렸다는 서운함보다 어머니께 혼날 일이 걱정이었지요. 어머니로서도 막내의 첫 소풍을 위해 큰 맘 먹고 건네주었을 거금 500원이었음이 분명했으니 분명코 엉덩이가 멍들도록 손매질을 할 게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냐구요? 냅다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형님들이 주변을 감싸고 경운기도 멈춰 섰습니다. 어머니가 급히 경운기에서 내려오시고 자초지종을 물었지만 계속 울 뿐이었습니다. 500원을 잃어버렸다고, 소풍 안 간다고 떼를 썼습니다. 그야말로 떼였습니다.

전략은 제대로 먹혔습니다. 막무지간 막내의 떼에 어머니는 혼을 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꽁꽁 숨겨둔 지갑을 꺼내 붉은 빛이 도는 천원을 꺼내 손에 꼭 쥐어주었습니다. 그까짓 돈 500원에 사내새끼가 우는 게 아니라면서 말이지요.

그럼 500원은 어떻게 됐냐구요? 생애 첫 봄소풍을 신나게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가 500원을 건네주셨습니다. 바꿔 입고 간 바지 뒷주머니에서 찾으셨다며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제 첫 봄소풍의 용돈은 1500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거금을 되었던 게지요.

오늘 사진은 바로 소풍간 아이들의 사진입니다. 벗이 보내온 사진 속에는 교사로 임명되고 첫 담임을 맡은 젊은 선생님이 담겨져 있습니다. 30년 세월이 훌쩍 넘겼으니까 지금은 퇴직을 얼마 남기지 않았을 겁니다. 용강초등학교 1학년 4반 담임, 황순아 선생님 잘 계시지요?
곧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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