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길을 걸으며

▲ 김세광 하조나라 대표

꽤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다. 물기를 잃어버린 산야는 태연한 척 푸르렀지만 혹독하게 뜨거움을 이겨내고 있었다.

나란히 서서 숲을 이룬 나무들도 길에 늘어선 작은 꽃들도, 더위에 황폐해지는 마음을 위로하듯 큰 꽃봉오리를 피어낸 수국도 지친 듯 목이 꺾여있다.

대지는 갈수록 뜨거워지고 살아있는 것들은 초점을 잃은 듯 망연했다. 평소 같으면 계곡의 입구에서부터 우렁차게 쏟아지는 물소리가 시원하게 마음을 열어 젖혔을텐데 지금은 소리마저 야위어 있었다.

새삼 바위를 뚫을 듯한 힘찬 물소리가 그리웠다.
우거진 숲과 계곡이 곁에 있어 내겐 큰 자랑 거리였고 위안이었는데 요즘 그들이 힘을 잃고 있으니 내 마음도 그들과 다를 바 없었다.

비가 내리지 않는 동안은 즐거워해야 할 일도 그다지 즐거워 보이지 않았고 슬퍼해야 할 일도 그다지 슬프지 않았다.

내가 보다 인간적인 사람이 되려면 스스로 변하려고 애쓰는 것보다 우선 비를 내리게 해야 한 다는 생각에 줄곧 갇혀 있었다.

읍으로 향하는 길목에 서있는 저수지는 올해도 불안하게 곧 바닥을 드러낼 참이었다.
아아, 작년 이맘때도 그러했다. 푸른 물을 가득 담았던 저수지가 기어코 바닥을 드러내고 마치 초원인 양 무성했던 잡초를 보고 얼마나 기막혀 했던지.

그동안 오며가며 푸른 물 가득 담은 호수의 푸근함에 마음마저 여유로워지곤 했는데 어느날 모든 것이 폐허가 되어 있었다.

못볼 것을 보아야하는 사람들의 기구한 탄식처럼 갈수록 세상이 어쩌려고 그러는 건지. 어찌되었던 속 시원히 비가 내려야 흔들리는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날씨가 무더워지기 시작하자 무작정 계곡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물이 반가운 아이 들이 내는 아우성에 산촌은 조금씩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이들이 물속에서 휘젓고 다니다보면 어느새 물은 흐려졌고 사람들은 물에서 나와야 했다.

물 속에는 지난 겨울에 떨어진 낙엽들이 떠나 지 못한 채 쌓여있었다. 진즉에 사라졌어야 할, 흐르는 물에 분해되고 흘러가서 작은 고기들의 먹이가 되고 거름이 되 는 역할을 했어야 할 잎들이었다.

물가에는 자연 속에서 무거웠던 짐을 내려놓으려던 사람들, 시원한 물놀이를 기대했던 사람들 도 실망스런 표정이 역력했다.

긴 계곡을 따라 평소 멈추지 않고 졸졸거리며 물이 흐른다는 것, 나무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당연스럽게 여겨지는 일도 실은 숱하 게 가슴 졸인 끝에 성취된 일이라는 것을.

지금까지 이어온 그런 평범해 보이는 일들이 정작 우리에게 얼마나 감사한 것이었는지 이제서 야 자연을 이루는 것들의 나름의 역할과 관계에 큰 가치가 숨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당장 비가 내리지 않으니 자연도 자연스럽지 못하고 그들의 앞날도 나의 일상도 불분 명하고 불안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갈곳을 잃은 채 바위에 들러붙은 이끼들, 목마 른 나무들, 정리되지 못한 기억들이 앙금처럼 남아 나를 답답하게 했다.

그러나 결국 올 것은 오고야 말았다. 쌓인 울분 을 터뜨리듯 천둥이 치고 소나기가 물을 퍼붓듯 땅을 적셨고 대지는 모든 비를 그대로 들이켰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빗속에 서서 비를 맞았다. 머리와 우비에 와 닿는 강한 빗줄기에서 후두둑 소리가 튀었다.

세찬 비가 쉼없이 온 몸을 두들겨대니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희열이 전해진다.
그동안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열불이 점차 가라 앉고 머리가 가벼워진다. 숨죽여 흐르던 물도 당당하고 제 길을 찾아 힘 차게 흐른다.

바위에 오래 눌러 붙었던 이끼들과 물때들이 강한 물살에 씻기어지고 점차 새살이 돋아나듯 바위의 뽀얀 언저리가 드러났다.

고개 숙이고 있는 모든 것들이 일어나 음악처럼 흐른다.
살아있음은 이렇게 힘차고 희망적인 것이었던가? 휴우! 고통스러운 시간은 이렇게 지나가고 자연은 그동안 가빴던 숨을 고르고 나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비가 내리면서 세상 일들이 뒤집기 한 판처럼 갑작스럽게 바뀌어졌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행복도 고통도 어쩌면 마음을 뒤집는 한 판의 놀이처럼 변하는 것일까 ? 물이 넉넉해진 덕분에 올 여름 산촌 생활은 한 층 시원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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