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녀탄금혈로 일컬어지는 명당

한반도 최남단 백두대간 끝자락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수만 수천 년 슬프도록 뼈아프거나 윗몸 다 들어나도록 환하고 밝은 이야기들을 고스란히 담아냈을 백운산. 백운산은 어머니처럼 따스하고 너른 품을 지녀 굽이굽이, 자락 자락마다 사람 사는 마을을 참 옹골차게도 품어왔습니다.

일찍이 아름드리 수많은 수종의 나무들을 키워 골골마다 웬만한 가뭄에도 물길을 멈추지 않는 4대 계곡을 내어놓아 손가락으로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물고기를 키우고 사람들의 농사를 도와왔지요.

사람들은 백운산 골골마다 스며들어 원추리 같은 맑은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산이 지닌 역사가 그처럼 아름답기만 했다면 얼마나 은혜 할 만한 일이겠습니까 마는 누군가는 수탈을 피해 터전을 버리고 도망치듯 입산을 택해야 했던 이들도 적지 않았을 테지요. 비록 척박하나마 화전을 일구며 신산스러웠던 삶에 비로소 작은 평화라도 얻었다면 그것으로 족할 일입니다.

백운산은 해방 전후 많은 아픔을 간직한 산입니다. 여순사건 이후 1차 빨치산 활동이 전개됐던 무대가 바로 백운산이지요. 그때부터 백운산이 소중하게 품었던 작은 마을들은 낮에는 군경이 회복하고 밤에는 빨치산이 다시 점령하는 역사의 아픔이 되풀이 됩니다.

산자락 마을들은 산사람과 군경의 경계지대에 살면서 어쩔 수 없이 모진 핍박과 고난을 견디어야 했습니다. 전쟁이라는 폭력은 인권이나 인본과는 끝과 끝에서 서로를 마주 보는 일이지요.

전쟁은 언제나 그 땅에 터를 잡고 사는 이들에게는 아픔과 상처만을 남길 뿐이었으니 그 난리 통에 생목숨조차 온전히 보전하기 힘들었을 테니 그 시절 산에 담긴 슬픔과 아픔 한 귀퉁이라도 어디 이 짧은 이야기에 담길 수는 없는 노릇이겠습니까.

하지만 백운산은 그 모든 역사가 토해놓은 모든 이야기를 묵묵히 안은 채 여전히 바람이 불면 바람을 내어놓고 소낙비가 쏟아지면 물길을 내어놓으며 우리 곁에 푸르게 남아 있습니다. 쓸쓸하게 어느 산허리에 묻혔을 빨치산의 한 마저도 “이제 괜찮다. 그 삶이 무거웠음을 모르지 않으니 이제 편히 잠드시라” 다독거리면서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오늘은 백운산이 품은 마을을 담은 사진 한 장을 여러분께 내어놓을까 합니다. 옥룡면 도선국사 마을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양산마을의 옛 모습입니다. 지금이야 마을의 경계가 잔뜩 허물어졌지만 사진 속에는 중산마을과 상산마을의 경계가 확연합니다.

계곡을 따라 집들이 들어선 중산마을은 한 눈에 보기에도 인가가 제법 들어서서 마을의 크기를 알 수 있지요. 상산마을은 중산마을과는 달리 백운산 중턱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원님의 식수였다고 전해지는 사또 샘이 있는 상산마을은 마치 백운산이 병풍처럼 호위하고 있는 모습인데요, 아름드리 당산나무를 찾는 일도, 봉강면 넘어가는 고갯길이 어디메쯤 되는지 가늠하는 일도 퍽 재미를 더해 줍니다.

사진에서도 언뜻 느꼈을 테지만 양산마을은 선녀가 거문고를 타는 모습을 닮았다 하여 예로부터 옥녀탄금혈로 일컬어지는 명당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지요. 상상력을 더해 보십시오. 선녀가 내려와 신비로운 거문고를 연주하는 모습 말입니다. 혹은 맑은 샘물 옆에서 거문고를 내려놓고 시원한 물 한바가지를 공양 받은 뒤 마을사람들의 축원을 빌어주는 선녀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도 괜찮습니다.

사진의 각도를 살펴보면 아마도 촬영장소는 마을의 맞은 편 도선국사의 옥룡사를 품었던 백계산 중턱쯤이 아닐까 싶은데요, 산간임에도 마을 앞에서는 제법 너른 전답이 펼쳐져 있으니 이곳 사람들의 곳간이 넉넉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미루어 곳간에서 인심 난다 했으니 이곳 양산마을의 인심도 짐작 가는 바가 없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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