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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한반도 모든 불행의 원인 ‘분단’사진을 통해 풀어보는 여순항쟁1
최인철 기자  |  hwakae72@gycitize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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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0.01  09:5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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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해방 이후 한반도의 분단은 당시 소련과 미국의 본격적인 냉전체제 돌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물론 남북분단에 있어 왜놈들의 책임은 다시 일러 무엇하겠습니까마는 글의 성격상 생략합니다)

미국과 소련, 전승국이면서도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각각 선택한 그들은 일본이 물러간 한반도를 세계2차대전 승자에게 떨어진 전리품쯤으로 파악했던 게지요. 그리하여 각자 자국의 이익을 최대한 포함시키겠다는 시각으로 접근했을 뿐 한반도를 조선이라는 독립적 자주국으로 파악할 생각이 이들에게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분단은 결국 조선민족의 입장에선 역사상 최악의 결정이자 모든 불행을 품고 있는 음험한 씨앗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분단은 남북간 군사적 이념적 대치상황은 물론 남한 내 모든 좌우대립이나 갈등, 이로 인한 크고 작은 사건과 학살, 테러에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하게 됩니다. 분단이 대구사건이나 제주 4.3항쟁, 10.19 여순항쟁 그리고 한국전쟁 등 해방 전후 한반도 피의 역사를 파생시킨 가장 큰 원인이었다는 결론은 전혀 무리가 없습니다.

더나가 이승만 독재정권의 탄생, 4.19혁명, 5.16군사쿠데타 이후 군사정권의 독재, 5.18 광주민중항쟁, 87년 6월 항쟁 그리고 비핵화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북한의 비핵화 논의가 한창인 현재에 이르기까지 분단은 한국현대사를 떠받치고 있는 한 축으로써 여전히 한반도를 둘러싼 모든 사건과 현안의 기저에 음험하게 녹아 있지요.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함에 따라 일본의 식민 상태였던 조선은 해방을 맞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해방이 아니었지요. 8월 15일 미국은 소련의 남하를 막기 위해 38선을 기점으로 북한은 소련이, 남한은 미군이 점령 통치하는데 합의하면서 한반도는 또 다시 외세의 지배를 받는 기형적인 상황을 맞닥뜨려야 했습니다.

그해 8월 이미 청진시에 내려와 있던 소련군은 발 빠르게 평양에 군대를 주둔시켰습니다. 그러나 북한에 주둔한 소련군이 직접적인 군정을 실시하지 않았던 것과는 달리 9월 6일 서울에 주둔한 미군은 곧바로 정부수립 전까지 남한을 직접 통치하는 군정체제에 들어가게 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 조선민중에 의한 자주적 독립 쟁취가 아닌 외세에 의해 해방을 맞으면서 빚어진 역사적 참극이었지요.

외세에 의한 해방 분단을 불러왔다

잠시 그 시절을 들여다볼까요. 1945년 12월 16일 미국, 영국, 소련은 전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외무장관 회의를 개최하게 됩니다. 이른바 모스크바 3상 회의였지요. 이곳에서 조선은 조선의 문제를 다루는 회의에 대표단조차 파견하지 못했습니다. 민족의 운명을 결정지을 회의인데도 말이지요.

이 회의에서 미국과 소련은 당초 첨예한 대립을 보였으나 결국 12월 27일 조선의 입장은 완전히 배제한 채 <한국 문제에 관한 4개항의 결의서>라는 이름의 합의문을 채택한 뒤 한반도에 민주적인 정부수립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하고 최장 5년 기간 동안 신탁통치를 결정하는 만행을 저지르게 됩니다. 당연히 찬반논란 겪으면서 조선민중은 격렬하게 부딪히면서 많은 피해와 갈등을 양산했지요.

그러나 그마저도 미소공동위원회는 결국 아무런 소득 없이 결렬됩니다. 미국의 돋보이는 역할에 따라 남북에 각기 다른 정부가 수립되는 형국을 맞게 된 것이지요. 이후 분단은 더욱 굳어졌습니다. 미소 공동위원회가 성과 없이 해산되자 1947년 11월 14일 유엔은 유엔 감시 하의 남북총선거를 가결했으나 남한에 비해 인구가 적은 북한이 불리하다고 판단한 소련은 유엔의 결의안을 거부하기에 이릅니다.

이 같은 위기 속에 통일 정부수립을 위해 김구 선생 등이 1946년 7월 좌우합작 7원칙을 발표했습니다만 이 역시 미 군정과 우익계열의 한국민주당이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를 구성하면서 결렬되고 결국 1947년 남한 단독선거를 유엔은 의결하면서 통일정부 수립을 염원하던 한반도는 위기의 늪으로 더욱 빠져들어야 했습니다.

분단을 반대하던 한국독립당의 김구 선생과 민족자주연맹을 조직한 김규식 선생 등이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를 제안하는 등 분단을 막기 위해 마지막 힘을 쏟았지만 결국 이승만을 필두로 한 남한 내 정치세력은 5월 10일 남한 단독선거를 실시하고 맙니다.

이후 남한은 1948년 8월 15일 단독정부수립을 선포하고 대한민국을 국호로 단독정부를 수립했고 북한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면서 한반도 3.8선을 기점으로 국토는 공식 분단됐고 민족은 분열되는 참담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받아 안게 됐지요. 이 같은 남북 단독선거는 한반도 분단을 더욱 고착시키고 남한 내 이념투쟁을 더욱 가속시키는 원인이 됐음은 물론입니다.

특히 정부수립 이후 미국의 묵인 아래 좌익계열에 대한 탄압을 실행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소요사태가 벌어지게 되지요. 이런 가운데 벌어진 대구사건은 좌익계 봉기를 전국적으로 확산시켰으나 서북청년단과 백열사 등 이승만 정권의 비호를 받은 우익단체의 백색테러 등으로 전국은 급격한 혼란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는 이를 두고 “한민족 사회는 전승국간의 세력균형의 필요성 때문에 국토가 분단될 위험이 있음을 제대로 인식하고 분단방지책을 시급히 마련했어야 했다. 국토분단으로 빚어질 민족분단을 막는 일이 당시 민족사회의 최대과제였으나 국제세력 사이의 분단책동을 스스로 극복할 만한 능력이 없었고 오히려 외세의 분단책동에 동조하는 분단책동세력이 민족내부에 형성되기도 했다”고 한탄했습니다.

역사학자인 서중석 교수도 “(해방 당시)민중은 지도자들이 좌와 우로 갈라져 싸우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며 “더구나 분단은 극좌와 극우의 행태를 볼 때 국제전 같기도 하고 내전으로도 보이는 동족상잔의 참혹한 전쟁을 필연적으로 일으킬 것으로 예견되었다”고 지적합니다.

강정구 동국대 교수도 “분단국가 수립은 조선의 민족사적 핵심과제인 통일국가의 수립을 배반한 반역사적인 것이었다”며 “분단은 반역사적이고 반민족적인 사건”이라고 꼽았지요.

모두들 분단이 민족사적 불행의 원인임을 지적하고 있는 게지요. 결국 해방 격동기에 발생한 여순사건도 필연적으로 이 분단이 빚은 상황 속에서 원인을 찾을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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