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등 산악지대 입산계획...이동경로 광주 아닌 구례

제주동포 학살을 거부한 여수 주둔 14연대의 목표는 남조선 해방이나 이승만 정권을 타도하고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에 남한정권을 넘겨주는데 있었다고 보는 것은 확대해석의 아무래도 지나친 추측일 겁니다.. 역사에게 너무 많은 과정법의 무게를 부여하는 것이란 말이지요.

아무리 어리석은 군인이라 할지라도 수천도 되지 않는 봉기군으로 막강한 전력을 앞세운 정권이나 국군을 상대하겠다는 계획했다는 건 무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이승만 정권의 배후에는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는 미군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었음으로 이는 애초에 불가능한 일임을 청맹과니가 아니고서야 모를 리 없는 일입니다.

이는 처음부터 계획 속에 있지도 않았다고 봐야 더 타당할 일일 겁니다. 더구나 봉기군은 이승만 정권이나 역대 군사정권이 낙인을 찍은 것처럼 남로당과도 사전모의를 통해 거사를 도모한 것이 아니어서 봉기 이후 남로당의 지원을 받을 수도 없는 일이었지요.

그러니까 14연대 봉기결정은 4.3항쟁을 진압을 목전에 둔 군 내부의 반발세력이 자체적으로 결정한 일이었다고 보는 게 훨씬 순리에 맞는 일입니다. 실제 여순을 접한 남로당은 몹시 당황했습니다. 특히 남부군 사령관으로 우리들에게 익숙한 이현상 역시 여순에 대해 크게 질책했다는 것을 보면 여순과 남로당 모의설을 주장하는 것은 억지에 가까운 일임을 쉽게 간파할 수 있는 일이지요.

그것은 여순사건 발발 이후 14연대 봉기군의 진로를 통해서도 확연히 드러나는 일입니다. 여수를 장악한 뒤 인민위원회가 지역치안과 행정을 담당하게 되자 대다수의 봉기군은 순천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물론 이 같은 행군을 두고 여수를 장악했으니 순천이 다음 표적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 광양토벌군 진지

실제로 사건 당일인 20일 오전 봉기군은 치안을 위한 일부 병력만을 남기고 대다수의 병력인 2천여 명을 열차와 차량을 타고 곧바로 순천으로 향했으니 그리 생각해도 크게 무리라고는 할 수 없을 겁니다.

여수로부터 소식을 접한 뒤 새벽 순천으로 급파된 제4연대 등 국군은 방어막을 구축하고 봉기군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봉기군은 의외로 손쉽게 순천에 입성합니다. 오전 9시 30분경 반란군 선발부대 7백여 명이 기차로 도착하자 이곳을 방어하기 위해 주둔하고 있던 제14연대 2개 중대가 봉기군에 전격 합류했고 제4연대 1개 중대도 사병들을 중심으로 봉기군에 합류하면서 방어군은 사실상 전의를 상실했던 탓이었지요. 여기서 한 가지 주목되는 점은 순천을 손에 넣은 봉기군의 다음 행로에 관한 것입니다. 봉기군의 처음 계획이 이승만 정권 타도였다면 봉기군은 이 같은 여세를 몰아 광주로 진군해야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봉기군의 진로는 광주가 아닌 구례였습니다. 바로 지리산이었던 게지요. 실제로 21일 이승만 정권이 여순 일원에 대해 헌법에도 없는 계엄령을 발표한 뒤 총공세에 나서자 봉기군 대다수는 산악지대를 통해 지리산으로 걸음을 옮깁니다. 일부는 벌교를 거쳐 화순의 백아산 등 산악지대로 몸을 피신해 장기전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이에 대해 여순항쟁 연구자 주철희 박사는 “제주학살을 거부하고 봉기한 14연대의 목표는 확전이 아니라 순천과 구례를 거쳐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봉기군은 국군을 상대할만한 무기는 물론 병력조차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빠르게 지리산 등으로 피신해 장기투쟁에 나서는 것이었다”며 “이것이 이른 바 1차 빨치산 투쟁의 시작”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봉기군의 당초 목적지가 지리산 등 험산준령을 끼고 도는 전남동부권 산악지대였음은 토벌과정에서 나타납니다. 여수와 순천을 점령한 후 봉기군은 이들 지역의 치안과 행정을 모두 인민위원회가 갖도록 하고 학생과 청년들에게 무기를 지급한 뒤 일부를 제외한 주력부대는구례방면으로 발길을 옮긴 것입니다.

진압 후 학살 피해 대부분 군인 아닌 민간인

▲ 백운산 토벌작전

만약 봉기군이 확전을 선택했다면 전남지역 군사요충지인 광주를 공략하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행로는 다시금 열차 등을 이용해 승주를 거쳐 곡성을 따라 움직이거나 벌교를 거쳐 화순 등지로 북상하는 육로를 선택해야 했지만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주력부대의 행군은 구례를 향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2일 일부 봉기군은 광양으로 향했는데요, 광양 역시 구례 지리산과 마찬가지로 백운산이라는 험준한 산악지대를 품고 있다는 지형적 공통점이 있음은 시사하는 바가 없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은 토벌과정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23일 토벌군이 박격포와 정찰기의 공중지원을 받으며 장갑차부대를 선두로 순천진압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사실상 봉기군의 활약은 크게 드러나지 않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토벌군에 맞서 치열한 시가전을 벌인 당사자는 다름 아닌 소총 등으로 무장한 학생들과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달리 말해 봉기군은 인민위원회와 청년과 학생들에게 치안을 맡긴 뒤 당초 계획대로 입산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토벌대와 산발적인 교전을 있었으나 결국 입산하는데 성공했고 남은 청년과 학생들이 치열한 시가전으로 맞서다 결국 처참한 살육전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이지요. 진압 후 수천의 학살피해자 역시 교전 당시 숨진 군인을 제외하면 인민위원회 등 여순 가담자와 함께 죄 없는 학생과 그리고 청년들, 민간인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여순을 평정한 군인들은 가장 먼저 봉기군과 동조자를 철저하게 색출해 처벌하는 작업에 나섭니다. 진압군의 처벌정책은 동족에 대한 아량이나 연민의 정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인정도 찾아볼 수 없는 매우 잔혹하게 진행됩니다.

▲ 입산자 자수독려

재판은 바랄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누가 부역자인지 판단의 객관적 근거가 부재한 상태에서 경찰과 우익인사, 청년단원 등 봉기군 치하에서 도망치거나 숨죽이고 있던 세력들이 거리를 활보하며 민간인 참여자의 색출작업이 진행됐고 그것은 보복 테러와 무차별적인 학살로 이어졌습니다.

무고한 청년들이 단지 학생복을 입은 죄, 흰 운동화를 신은 죄, 국방색 런닝셔츠를 입은 죄, 머리를 짧게 깎은 죄, 과거에 좌익단체에 가입한 적이 있다는 죄, 가족과 친구 가운데 좌익에 가담한 사람이 있다는 죄 아닌 죄로 학살됐습니다.

그러나 이 학살피해자 가운데 군인들에 대한 기록은 별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교전 중 숨진 820여 명의 봉기군을 제외하면 말입니다. 그것은 봉기군 대부분이 백운산과 지리산 등 산악지대로 숨어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의 애초 목적은 제주학살명령을 피해 무장봉기를 일으켰지만 이를 기점으로 이승만 정권 타도를 위한 무장투쟁이 아니었던 겁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진압군을 피해 산악지대로 입산한 뒤 산발적 유격전을 벌이며 한반도 상황이 변하기를 바라며 버티는 것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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