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다섯 명의 친구들이 모였습니다. 뜨거운 국물이 그리운 겨울날이었던 터라 낡은 골목길에 자리 잡은 낡고 오래된 해물탕집이었지요. 물론 쓴 소주도 몇잔 곁들인 자리였습니다.

거의 십 년만이니 강산이 한두 번 얼굴을 바꾸는 세월이 흘렀을 겁니다. 요즘이야 자고 일어나면 천지가 개벽하는 시절 이니 어쩌면 얼굴을 보지 못하고 지낸 그시간 동안 강산뿐 아니라 우리네 청춘도 바투 기울고 마음의 시침도 저뭄으로 향해 가는 세월이었을지 모릅니다.

세월의 간극이란 게 참 냉정한 얼굴을 지닌 것이어서 게 중에는 그 많고 곱스럽던 검은 머리카락은 오간데 없어지고 불빛에 반짝 일렁거리는 민머리 친구도 있고 기어이 치아 몇 개를 빼내고 임플란트를 해 넣었다며 하얗게 웃음을 날리는 친구도 있었지요.

모두들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드물지 않게 하얀 머리카락이 삐죽이 얼굴을 내미는 중이었으니 세월은 참으로 무심하게도 흐른 모양입니다.

한 중견기업에서 운영하는 골프장 운영 팀에 취직한 탓에 충청북도 음성 땅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친구도 돌아와 한 자리를 차지했고 한동안 제 자리를 찾지 못하다가 돌고 돌아 사회복지사로 터전을 잡은 친구는 물론 술은 못하지만 건축설계사로 자신이 그리는 선에 책임을 지고 사는 친구도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이고 보니 나이는 다들 백년 세월이 반으로 접히는 오십줄에 들어앉았지만 세월을 훌쩍 뒤로 돌려 놓은 듯 선생님의 눈을 피해 술 마시는 사고뭉치 고등학생으로 돌아간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식탁 넘어 육두문자가 날아와도 묵은지처럼 잘 익어가는 행복한 저녁이었지요.

그 중에서도 말입니다. 참 반가운 얼굴이 유독 눈에 들어왔지요. 이제 20년차 학교에서 훈장질을 하고 있는 친구는 벌써 몇 년째 교무부장 딱지를 붙이고는 그 시절 우리가 그렇게도 싫어하던 훈계질에 여념이 없다 하더니 곧 큰 딸아이 시집보낼 궁리를 하고 있었지요.


그 시절 유달리 기타를 치면서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던 친구였는데 가난한 집 2남 3녀 가운데 맏아들로 태어난 탓에 쉬는 날마다 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와야 했던 녀석이었습니다.

일요일 녀석 집을 찾아갔다가 아버지의 손에 잡혀 탐스러운 오이가 옹글옹글 열매를 맺기 시작한 비닐하우스에서 거름을 날라야 했던 기억도 새삼스럽더군요.

“밥은 밥값을 하고 얻어먹는 법”이라는 아버지는 40kg이 넘는 거름 한가마니를 거뜬하게 지고 나르는 아들 놈 친구를 흐뭇하게 바라보시더니 “덩치 값은 하는 놈”이라더니 어머니가 새참으로 내놓으신 막걸리 한 사발을 불쑥 내밀었지요. 한바탕 땀을 흘리고 난 뒤에 마시는 막걸리 맛은 참 달았습니다.

고교 3학년 시절이 나날이 깊어진 어느날 친구가 제게 말했지요. 대학진학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녀석에게는 6학년인 막내와 중학생인 여동생 둘, 그리고 동생들을 위해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을 스스로 접고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한 여동생이 탐스럽게 자라고 있었던 게지요.

아무래도 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짓다가 취업을 해야겠다는 게 친구의 고백이었습니다. 쑥쑥 커가는 동생들을 위해 직접 돈을 벌어야 겠다는 말이 뒤를 이었습니다.

친구의 보증을 섰던 게 잘못돼 그렇잖아도 힘에 부쳐 하던 아버지는 여러 날 시름에 겨워하고 계시다는 말도 잔잔한 연못에 돌멩이 던지듯 잔뜩 건조해진 어조로 뱉어 냈지요.

어떻게 됐냐고요. 결국 친구는 어느 작은 지방 국립대에 진학을 했습니다. 장학금을 받는 조건이었지요. 아버지가 그런 아들의 결정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던 겁니다. “장남이 잘 돼야 집안이 잘 되는 법”이라는 다소 고지식하고 가부장적인 이유를 댔지만 아마도 무능한 자신 때문에 자식의 앞길을 막는 일은 기어이 허락 하고 싶지 않았으리라 여겨집니다.

친구는 군대를 다녀온 뒤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임용고시에 합격해 학교 선생님이 됐습니다. 더구나 대학시절 만나 함께 아이들을 가르치던 첫사랑과 결혼해 아들 딸 낳고 알콩달콩 잘 살고 있으니 당시 가난한 아버지의 결정은 여러모로 현명했다는 게 뒤늦게라도 밝혀진 셈 아니 겠는지요.

여기에 제가 이 친구 결혼식을 조금 망쳐놨었다는 이야기는 고백해야 되겠네요.

바로 결혼식 사회를 봐달라는 부탁을 받고 덜컥 허락을 한 것인데 문제는 제가 대책 없는 무대공포증을 갖고 있다는 것이 지요. 도대체 얼마나 떨었는지 결혼식이 어떻게 끝났는지도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주례를 보던 녀석의 지도교 가 “누가 보면 사회자가 장가가는 줄 알겠다”며 핀잔을 주었을까요.

허겁지겁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여행길에 오르던 친구를 차에 태우고 공항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네 결혼식 사회는 내가 봐 줄게” 친구의 말의 차안에 웃음이 한바탕 나뒹굴었습니다. 시종 긴장했던 신부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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