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태 전)농협중앙회 광양·여수·순천시지부장

▲ 이종태 전)농협중앙회 광양·여수·순천시지부장

선친께서는 이야기를 참 좋아하셨다. 어울리기를 좋아하다보니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인연을 소중히 여기다 보니 이야기가 다듬어지고 쌓였나보다. 아버지는 형님 세분으로도 부족했던지 고추를 달고 나오셔서 ‘또’자가 돌림자인 ‘수’자 앞에 붙으며 운명적으로 이야깃거리를 달고 낫다고들 했단다.

초가삼간 등짝 붙이기도 비좁아 밤이면 동각으로, 친구 집으로, 머슴들 방으로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고단함을 누일 때 마다 비몽사몽간에 이야기들이 비집고 들어왔나 보다.

살아갈 길도 가늠이 서지 않고, 형님들 등살도 피할 겸 친구들 몇사람과 현해탄을 건너가기로 결심하던 날 밤, 할아버지께서는 한지에 싼 곱게 빻은 고춧가루봉지를 쥐어주시며 말씀하셨다.

“정말로 위급할 때는 눈을 감고 사방에다 이것을 뿌려라. 총은 총을 부르고, 칼은 칼을 부르나 고춧가루로는 몇 놈은 필적할 수는 있어도 생사 문제는 없어 큰 송사는 피할 수 있느니라.”

먼 여행길 동행한 친구들의 이야기를 건성으로 흘리며 아버지는 두 눈을 지그시 감고 과거를 회상하며 닥쳐올 두려움과 외로움을 달랬을 것이 . 향교를 출입하며 만난 부모님들이 맺어준 어머니는 사주팔자가 노총각과 혼사를 해야 수(壽) 를 누릴 수 있다 하여 11살 더 많은 아버지에게로 시집을 왔다.

연이은 딸로 태어난 탓에 어머니역시 이름에 ‘또’자가 붙어 내심 천생연분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서로 도닥거려주며 살아온 과거를, 무던한 성격이라 가정을 잘 지켜주리라는 생각에 믿고 떠난다는 위안을, 발목이 손아귀에 들게 가늘어도 추석날 마을에서 ‘도구통 지기’ 내기에서 일등을 한 둘째 형을 생각하며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심호흡도 한번 해보고, 고춧가루에 얽힌 할아버지의 이야기도 생각이 났을 것이다.

어느 날 할아버지께서 광양고을 현감의 호출을 받고 동헌에 들렸더니 현감께서 좌정한 고을 선비들을 둘러보며 말하였다.

“알다시피 관내 아무 마을에 아무개라는 포악하기로 소문난 놈이 있어 제 힘만 믿고 반상의 법도도 무시하고 마을 사람 들을 괴롭힌다하니 누구 한 분 기지(機智)를 발휘 하여 그놈을 포박하여 온다면 우리 모두 한잔 사며 그 용기를 치하해주면 어떻겠소.”

타천 반 자천 반, 소임을 맡은 할아버지께서 그 아무개 마을 어귀 동각에 도착한 시간은 새끼점심시간을 조금 넘긴 때였다.

무슨 일인지 궁금하여 모인 주민들에게 할아버 지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호령하셨다. “이 마을에 위아래도 모르고 주민을 괴롭힌다는 놈이 있다하여 내가 버릇을 고쳐주러 왔으니 어디 용기가 있다면 내 앞에 얼굴 한번 내밀어 보라고 전하시오.”

어떻게 전해 들었는지 장죽에 담배 한대 피울 시간이 조금 넘었는데 인상이 험악한 중년사내가 눈알을 부라리며 할아버지 코앞에 얼굴을 내밀었다.

“뉘신데 날 찾았소?” 할아버지께서는 미리 준비하여 한 움큼 쥐고 있던 고춧가루를 그 사내의 면상에 뿌렸고, 연만한 노인이라 얕보던 사내는 갑작스런 일격에 ‘욱’하며 비명을 지르고 마당에서 나뒹굴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사내의 두 손을 묶어 말꼬리에 달고 의기양양하게 동헌으로 돌아오셨다 한다.
그 일이 있는 후 현감께서는 옥룡 쪽의 송사 및 대소문제를 할아버지께 맡겼다는 대목에서 아버지는 생각을 잠시 멈추고 디시 한 번 심호흡을 하셨을 것이다.

‘호연지기’는 못 미처도 그저 이웃과 더불어 하루하루 유유자적하며 살아가시던 할아버지는 현감에게서 위임받은 일을 수행하면서 이웃들의 고단한 삶을 눈여겨보게 되었고, ‘사람이 곧 하늘 (人乃天)’ 이라는 말이 너무 좋아 마침내 동학의 길로 들어서게 되셨다.

‘왜가리 이샌’ 이라는 별호를 가진 할아버지는 출타 후 지금의 동내거리 다리에 도착하시면 큰 기침으로 귀가를 알렸고 발동기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 소리가 내 우정 집까지 들렸다고 아버지께서는 늘 자랑 하셨다.

아버지께서는 걸어서 순천 상사천에서 주먹밥을 드시고 불새를 넘어 낙안읍성까지 할아버지의 동학 관련 심부름을 수년간 해 오신 기억도 막둥이인 나에게 이야기해 주신대로 또 한 번 회상해 보셨을 것이다.

할아버지께서는 노력을 인정받아 ‘북접주’라는 명첩을 받으셨다. 고종이 파죽지세의 동학군을 달래며 외세를 끌어들이기 위한 시간벌기 용으로 제안한 동학군과 연정형태인 ‘집 강소’로부터 ‘통정대부’라는 칙령을 받으셨고, 김해 김 씨인 할머니는 ‘숙부인’이라는 칙령을 받으셨다. 아버지는 이 생각 말고도 참으로 많은 상념 속에 고향 땅을 뒤로 하셨을 것이다.

피한 것일까? 싫은 것일까? 아버지로부터 일본에서 겪은 이야기는 한 두 개 외에는 거의 기억이 없다. 그들이 버리는 대구 내장과 알, 귀송뎅이로 김치를 담아 내놓자 처음은 꺼리던 일본인들이 맛을 본 후 무척 좋아했다는 이야기.

오랜 굶주림으로 허기진 조선인들이 평소 밥을 많이 먹자, 공기로 일정량의 식사를 한 후에 작업량을 비교해 보라며, 소식과 일정한 시간에 규칙적인 식사가 좋다는 지혜 정도를 배워 왔다 말씀 하신 것같다.

아버지는 자식 된 도리로 부모 임종은 해야 한다며 애써 번 돈을 현해탄 오가며 대부분 길과 바다에 깔고 논 너마지기 살돈을 쥐고 귀향하셨다. 그래도 오고 가실 때 마다 자식을 보태, 셋은 잃고도 오남매를 키워내셨다.

아버지께서는 환갑이 넘자 일손을 놓으시고 우리 마을 당산에서 이야기꾼으로 제2의 인생을 출발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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