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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도 마셨고 오늘도 마시며, 내일 또한 그러할 것이다”최 기자의 술 이야기
최인철 기자  |  hwakae72@gycitize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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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2.25  11: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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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모르고 마시던 십대의 술이 곱게 익어
가정과 사회에 찌든 고단한 삶을 위로하네

지금도 딱히 술을 마다하지는 않지만(사실은 없어서 못 먹는 경우가 대부분이다)젊은 시절은 대개가 술의 나날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술은 늘곁에 있었고 나는 누가 옆에 있든 없던 술을 마셔댔다.

특히 연애와 그 끝일 수밖에 없는 이별의 시간이 오면 핑계꺼리가 좋았다. 비록 말이 되지 않겠지만 술을 마시기 위해 연애를 하고 이별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무엇보다 연애와 이별은 가벼운 연애시일망정 봇물처럼 시(詩)가 터져 나왔으니 당시로서는 그 맛도 나쁘지 않았다. 그게 스무 살 초입의 내 모습이다.

술친구는 많았고 핑계도 많은 시절이었다. 지나치게 감정에 푹 젖어드는 편이어서였겠지만 무언가 하나의 나락에 떨어지면 더 침잠되도록 나를 버려두었고 그것들이 곰삭아 에탄올 냄새 풀풀 풍기는 화학반응을 일으키기를 기다리는 것은 일종의 술을 마시기 위해 내가 예비한 일들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마신 술은 보통 3일 동안 주구장창 이어지게 마련이었다. 두주불사식인데 자취하던 시절이라 오전 열한시 쯤 아침과 점심을 겸해 먹는 밥자리에서부터 술은 으레 시작됐다. 학교 앞 밥집이라 처음엔 혼자 들어갔다고 해도 곧 아는 얼굴들이 문을 열고 들어서기 마련이어서 곧잘 자리를 키우고는 했는데 그리 시작된 술자리는 보통 예닐곱의 친구들이 합석한 뒤에야 끝을 보곤 했다.

▲ 전북 완주군 모악산 자락을 따라가다 보면 한국은 물론 전 세계의 술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독특한 박물관이 있다. 완주 술테마박물관이다. 술 종류 뿐 아니라 그옛날 젓가락 장단을 퉁기며 삶에 취하던 옛모습도 고스란하다.

첫 술자리가 파하는 시간은 대개 오후 3시에서 4시 사이. 그리고 남자아이들은 학교 앞 거리에 바둑알처럼 박혀 있기 마련인 당구장으로 향했다. 그때는 그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 즈음 한창 당구에 재미를 붙인 때문이기도 했지만 당시 당구장엔 생맥주를 배달해 주기도 해서 그곳에서도 술을 마실 수 있었던 탓이 매우 컸다. 당구 역시 술내기 당구였다.

변명이겠지만 당시는 할 수있는 게 별로 없었다. 서정주 따위를 신봉해 마지 않는 늙은 교수의 수업은 정말 재미없었고 가끔 학생운동에 대해 드러내놓고 적의를 드러내는 꼴도 우스워서 거의 모든 수업을 농땡이 치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오매불망 글을 쓰는 일도 시들해져서 “술 마시는 일밖에 달리 할 것이 없었다”고 말해도 큰 무리는 없을 지경이었다.

나는 술을 대학에 들어가서야 배웠다. 생각하면 남자치고는 매우 늦게 술을 시작한 셈이다. 보통의 친구들이 고등학교 때 술 담배를 시작했던 것과는 달리 친구들과 어울리면서도 술은 멀리 했다.

친구들이 치킨에 생맥주를 마시면 나는 생맥주 잔에다 콜라나 사이다 따위를 가득 부어 마시곤 했을 뿐이다. 아마도 그것은 청소년이라는 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지만 무엇보다 고주망 태형이었던 아버지와 한동안 깊게 빠져 허우적대던 교회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나의 아버지, 그러니까 내가 스물 세 살 되던 해에 귀천한 아버지는 주당의 현신이었다. 아버 지의 술은 말술이었고 마셨다 하면 기본이 대취(大醉)에다 만취(滿醉)였다.

힘든 농사일을 마치고 마을 구판장에서 벗님들과 마시는 술자리는 거의 매일처럼 이어졌고 저녁 열시 무렵이면 나는 곧잘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구판장까지 찾아가 끝날 줄 모르는 술자리에서 아버지를 빼내 오는 일을 수행하곤 했다.

막내라는 이유로, 다른 형제에 비해 아버지가 유난히 예뻐했던 탓인데 아마도 내가 딸아이였다면 아버지를 그곳에서 빼내 오는 일이 훨씬 수월했을 것이라는 내 추측은 거의 틀림이 없을 터였다.

아버지의 주사는 대부분 당신의 한(恨)에 관한 것이었다. 특히 가난한 집안의 맏아들로 태어나 하고 싶었던 공부를 접어야 했던 것에 대한 응어리다. 아버지의 학력은 조부가 탕진한 가계 때문에 그것도 해방과 함께 찾아온 한국전쟁이라는 시공간에서 겨우 국민 학교를 졸업한 게 다였다.

그것도 조부가 당신 일곱 살 때 훌쩍 세상을 뜨신 탓에 할머니와 함께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얼마 남지 않은 농사일을 거들고 땔감으로 쓸 나무 한짐을 해놓고 다녀야 했던 학교공부다.

그래도 성적은 좋았던 모양이다. 곧잘 전교 일등을 맡아 했다는 것이다. 할머니와 고모님, 나중에 만난 아버지의 친구 분들에게 듣는 말이 항상 “느그 아부지 집안에서 조금만 보태줬으면 무슨 자리 하나는 차지하고 남았을 놈이여”라는 소리였다. 예나 지금이나 돈 없으면 배울 수도 없다는 것은 별반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우여곡절 끝에 국민 학교를 졸업한 뒤 아버지는 본격적으로 농사일에 매달렸단다. 그 와중에도 한학을 공부한 외숙부 밑에서 문자를 깨우치고 책 읽는 일을 멀리하지 않아 역사와 문학 등등에 막힘이 별로 없었다.

고시 공부를 하던 작은 형님과는 한문으로 주고받아도 오히려 형님이 딸리는 형국이었고, 문학을 전공한 나와 견주어도 현대문학 이외에 고전과 근대문학에 대한 지식은 앞섰다. 아버지의 학업에 대한 집착은 그러했다.

그런 아버지가 정신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하는 날은 대개가 동창회 모임에 나갔을 때였다.
그곳에서 좀 잘나간다는 친구들을 만나게 되는 모양이셨던 듯 한데 그럴 때면 항상 자식들을 불러 앉혀 놓고 잔뜩 혀가 말린 목소리로 “느그들이 뭐가 부족허다고.....애비가 다 밀어 줄라니까 느그 들은 느그 하고픈 일 하고 살어. 땅 팔고 몸을 팔아서라도 나가 다 밀어 줄거니께. 알았제?”를 연신 외쳐댔던 것이다.

술이 당신을 잠의 늪으로 밀어 넣을 때까지 고장 난 테이프처럼 그 말만 읊조렸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아버지 없이 자란 탓에 하고 싶었던 공부를 다 하지 못하고 생각대로 피지 못한 당신 인생에 대한 회한이었겠으나 나는 그같은 아버지의 신세한탄이 참 싫었다.

그것도 술에 찌들어 자식 앞에 두고 무너지듯 뱉어내는 말들이 실패한 자의 넋두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술을 처음 접한 기억은 그랬다. 실패자를 위한 위안의 늪지, 혹은 도피처였다는 말이다. 술의 마술을 경험한 것은 유년이 훨씬 지나 성년이 되고 서른이 지나 아프고 슬프고 외롭고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경험하고 난 뒤에서야 비로소 경험했지만 말이다.

누구나 그러하듯 나의 첫술 역시 전투적이고 공격적이었다. 술,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함 해보자는 식이었던 것이다. 술의 맛을 알 수 있기에는 아직 세상살이가 짧았고 사는 일의 대강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술이 눈물의 다른 의미라는 것을 알기에는 너무 어렸다.

옛 선인들이 이르기를 십대가 마시는 소주 한병은 술에 맛도 모르고 마시는 의미도 느끼지 못하며 분위기에 휩쓸려 남이 마시니까 으레 마시는 것으로 알고 호기심에 마구 부어대는 철모르 는 한 병의 술이라 했고, 이십대가 마시는 소주 세병은 이 세상 삶에 제대로 적응할 줄 모르고 갈팡질팡 세상 탓을 하며 청춘을 불사르고 열정을 잠재우며 치미는 화를 삭이며 인간 세상에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잊기 위함이라고 했다.

하였으니 나의 첫술은 치기와 열정이 뒤섞인 십대와 이십대를 아우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이르기를 삼십대가 생각하며 마시는 양주 세병은 고단한 인간살이의 관문을 두드리며 앞날에 식견을 쌓고 폭넓은 삶을 위해 용솟음치는 희망을 키우는 것이라 했고, 사십대가 마시는 양주한 병은 가정과 사회에서 치이고 찌든 삶을 달래기 위함이고 일상생활에 고단함을 잊고 피멍들은 삶을 보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의 삼십과 사십대의 술은 여전히 무르익지 않은 열정에 휩쓸리고 절망의 쓴 독주를 이르는 것이니 못미쳐도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다.

또한 이대로라면 오십대 중년이 마시는 술은 인생에 허탈함과 외로움과 설움을 달래기 위함이고 허망한 생활의 과거를 되찾기 위한 선택이며 줄어드는 능력에 절규하는 최악의 발악이라 했으나 이를 장담 하기도 힘든 일이다.

오히려 절반도 지나지 않는 생에 대한 회한의 나날이 먼저 찾아왔으니 선배들의 술타령은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셈이다.

이렇듯 나의 주력은 역사가 없다. 뒤죽박죽이니 실수가 없을 수 없고 감정의 흘러가는 속도와 깊이 역시 측량한다는 것 자체를 바랄 수 없는 지경이다. 나의 술은 그냥 삶 속에 깊게 침투해 있는 바이러스와 같다.

위험하기는 하거니와 그렇 다고 치명적이지는 않아서 기쁘거나 슬프거나 아프거나를 따지지 않고 어떤 핑계를 대지 않아도 가까이에 있는 놈이다.

여전히 폭주이며 두주불 사이면서 순간 끊김의 연속이다. 술은 기억나지 않는 나의 뒤안길을 서슴없이 보여주되 기억에 없는 세계이기도 하다. 하여 나의 또 다른 세계를 펼쳐놓되 그것은 가끔은 망설과 같고 비루한 칼자루가 되는 일도 허다하다.

나는 과거에도 술을 마셨고 오늘도 술을 마실수 있으며, 내일 또한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 술은 좋은 도반은 못 된다. 외려 낭떠러지에 부는 폭풍이며, 화살을 앞에 둔 과녁에 가깝다. 그럼에도 술은 내 가장 좋은 벗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아니, 나를 이끌고 가는 주인이라고 해도 뭐무슨 상관이랴. 이제 술에 순응하는 법을 비로소 배웠으니 좀 더 세월이 흐른 나중이면 마셔도 그만 마시지 않아도 그만인 경계를 내게 보여줄 것이다. 오늘 나와 손잡고 인생을 나눌 술의 모습은 또 어떠할 지 다만 궁금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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