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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 주고 싶은 이야기들(3)이종태 전)농협중앙회 광양·여수·순천시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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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3.04  11:4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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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태 전)농협중앙회 광양·여수·순천시지부장

내 어린 시절 읍내 우산리 내우정 마을에는 수령이 오래되어 당산제를 모시던 느티나무를 비롯 하여, 팽나무, 이팝나무 등 십여 수가 저마다 알맞은 곳에 뿌리를 내리고 그늘을 만들어주고, 인근 마을 보다 크고 풍광도 그럴듯하여 사람들이 즐겨 찾는 당산이 마을입구에 자리하고 있었다.

바닥이 온통 바위투성이라 오르다 떨어지면 큰일이 나기 때문에 지나가는 어른들이 나무라지 않는, 적당한 높이에서 허리가 굽어 ‘말 나무’라는 별칭이 붙은 느티나무는 우리들의 놀이터가 돼주었다.

그런데 정작 우리보다 당산이 있기에 제일 행복한 사람은 우리 아버지셨다. 모진고생 이만 하면 내 몫 만큼은 하셨다며 환갑을 지나고는 심한일 놓으시고 어려운 살림살이를 두형에 맡기셨다. 소를 띠길 정도의 일을 하시며 당산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을 낙으로 삼으신 분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랜드캐니언의 세도나 지역을 예로 들며 지구상에는 21개정도 소위 볼텍스 (voltex)라 하여 지구의 중심에서 초자연적 힘인 우리말로는 ‘기’나 ‘혈’같은 전기적 에너지를 뿜는 곳이 있다고 말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아버지께서 이야기 하실 때 마다 앉으시던 당산 지정석은 규모는 작을지라도 분명 볼텍스 같은 혈맥이 있다고 나는 생각해 보았다. 동학에 참여로 사선을 넘나든 할아버지는 ‘천직(賤職)이 자식을 보전한 다며 아버지께 농사를 권장하셨다 한다.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살아오시며 겨우 한글을 읽힌 아버지께서 사랑방이나 일본노무자 숙소에서 들은 이야기에 5일 시장에서 파는 완판본 역사소설이나 영웅소설을 읽어 보탠 정도인데 이야기하는그 자리에만 앉으시면 신명이 나서 이야기 솜씨가 한양에서 책을 읽어주며 생계를 유지하던 전기수 뺨칠 정도 이었다고 한다.

특히 『임진록』에서 사명당이 일본군의 항복을 받는 부분에서는 당산 이곳저곳을 앉은 자세로 뜀질을 하시며 다녔고, 목소리는 상여를 이끄는 만가(挽歌)처럼 비장하기까지 하였다 한다. 혹여 외롭기만 하던 당산나무들이 사람들을 모아주는 아버지가 고마워서 세월이 만들어준 속이 비워진 몸통으로 아버지의 목소리에 같은 진동수로 힘을 보태어 에너지를 배가시킨다는 공진(共振) 이라는 재주를 부렸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아는 것이 부족한 만큼 전해 받는 것을 소중이여 기고 장죽과 담배쌈지처럼 가슴속에 늘 안고 다니셨는가보다.

누군가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의식의 몇 배인 무의식이 우리의 생각을 숙성시켜 주고 있다고 한다. 모방과 열정에는 그래서 필연적으로 각자 몫만큼의 창조가 허용된다.

한여름이면 아버 지의 목소리는 힘이 넘치셨다. 벼논을 매다 잠시 허리를 펴기 위해 당산을 찾은 인근 논 일꾼들, 더위를 식히려 들른 간갈치 장사, 사람이 모이면 뽕도 따고 임도 보는 동동구리무 장사와 참외장사, 딸아이 집에 온 이웃마을 노파, 오솔길 따라 걷다 잠시 시어가는 면부사람들이 그득히 모이면 아버지는 매자득금(埋子得金)의 효행 이야기를 접고 역시나 『임진록』에서 류성룡이 이여송 군대를 청병해올 때 압록강에서 벌린 재주겨루기 부분으로 옮겨 그 통쾌한 승리를 힘주어 이야기 하셨다한다.

이야기 모임에는 추임새를 넣어주는 사람이 있어야한다. 마을에서 힘깨나 쓴다는 분의 소가가 되어 예쁜 딸 둘을 낳고 당산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서 술장사를 하는 매자내는 이야기대목마다 조금은 절제되지 않은 웃음과 마른 두 손이었지만 그래도 감칠맛이 있는 박수로 호응을 선도하며 흥을 돋우었다.

세월은 변화를 요구한다. 당산 가운데 삼 구덕이 있던 자리는 메워지며 보리타작용 발통기가 놓여졌다. 아버지는 통통 소리가 빨리 움직이라고 다그치지만 소득은 별로 나아지지 않고, 이야기 시간만 빼앗아 갔다며 자주 불평하셨다.

마을 이장 집에는 라디오가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집집마다 라디오와 연결된 스피커가 설치되었 다. 정겨운 노래가 마을에 돌고 드라마가 아버지 이야기를 대신하면서 아버지는 하루가 다르게 목소리에 힘을 잃어 갔다.

잠을 설치는 밤이 많아진 아버지는 자정을 넘겨 인적이 없는 시간에 당산 제들 모시던 느티나무 뿌리에 걸터앉아 계셨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아버지는 깜짝 놀랐다. 가는 가지가 미풍에 흔들리는 소리와 확실히 구별되는 소리로 느티나무가 말을 하는 것이다.

“나는 자네가 즐겁게 이야기하기 수백 년 전부터 자네와 달리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만 왔네. 긴 세월 욕심 없는 소망까지도 들어만 주었지 도와는 주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서 속은 문질 러져 텅 비워지고 온몸에는 옹이가 이렇게 박혔다네. 갑순이 가마타고 시집가면 대견하여 하하 웃고, 갑돌이 상여타고 뒷산가면 가슴 아려 엉엉 울어 얼굴은 온통 주름투성이가 되었지. 들어주는 것이 말하는 것보다 더 힘들다네. 들어만 주어도 사람들은 위로받은 표정 이었어. 이제 자네도 상심 말고 말을 들어주는 연습을 좀 해보게나”

다음날 아침 아버지는 소를 몰고 일찍 논갈이를 나서는 큰형님의 인사말만 그저 듣기만하셨 다. 땔나무를 하려 도시락을 지게에 걸치는 작은 형님으로 부터는 눈인사만 받았다.

손주를 업고 밭에서 풋고추를 따서 한 주먹 들고 들어오는 어머니와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의 밥상을 차리는 형수님을 차례로 물끄러미 보고만 계셨다. 말을 놓으신 아버지는 음식을 놓은 것처럼 힘을 잃어 가셨다. 벼가 누렇게 고개 숙인 어느 날 아버지의 운구는 당산을 한 바퀴 돈 뒤 뒷산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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