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묵히 변화를 감내하며 살아온 초남마을 사람들

“봉화산 등에 지고 돋아난 초남. 명산 백운산의 명수(明水)도 앞으로 흐르네. 물줄기 따라 서남쪽으로 향한 어부의 배 언제 돌아오나 뱃머리 기다리는 가심 부픈 부녀들” <초남 마을 전래 향가>

▲ 초남마을 손재기 이장님

천혜의 황금어장이라 일컫는다. 백운산에서 시작된 동천과 서천이 바다와 만나는 초남마을은 갖가지 생선에 반지락, 꼬막, 낙지 등 별의별 수산물을 태산같이 싣고 날랐다니 작은 어촌 마을 치곤 삶의 윤택함도 남달랐을 법하다.

광양읍의 가장 남쪽 동서천 하구에 위치해 있으면서 풍부한 어족자원을 자랑하던 초남마을은 인근에 세풍 간척지가 만들어 지면서 농업과 어업이 함께 균형을 이루며 풍요와 인정이 넘치는 마을로 거듭났다.

초남마을은 500여 년 전 성(成)씨 성을 가진 사람이 처음 들어와 마을을 이뤘고, 이후 고(高)씨 손孫)씨 순으로 입촌 했다고 전해진다.

마을 주민들이 전하는 초남마을의 원래 이름은 초남(草南)인데, 바다건너 해창조(海倉租)를 넣어 두던 창고(세풍리 해안에 있었음)에서 조(租)를 실러갈 배들이 수심이 깊은 이곳 초남 해안에 정박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니, 이에 따라 초남 해안에는 선원들이 이용하는 주막들이 많았다. 주막에서 항상 노래 소리가 흘러나와 이를 노래 잘하는 앵무새에 비유해 남쪽에 있는 앵무새란 뜻으로 초남이라 칭했다.

이 초남이란 한자어는 우리말로 풀이돼 ‘새냄’이 됐고, 초남포는 ‘새냄개’로 풀이돼 초남마을을
칭하는 이름으로 쓰였다.

▲ 초남마을 표지석

커다란 돌에 적힌 초남마을이란 표지석을 지나 조금만 들어가니 바로 마을 회관이 보였다. 막
걸리를 들고 ‘똑똑’ 문을 두드리자 손재기 이장이 웃는 얼굴로 반겼다.
손재기 이장은 초남마을에서 꼼짝 않고 60년을 살았다. 그는 지난해 7월 초남마을 이장으로 취임해 마을 사람들로부터 온정이 넘치며 촉망받는 젊은 이장으로 통한다. 그의 나이 60이지만 동네에서 제일 막내니 젊은이장이라 불릴 수밖에.

그는 “지난해 이주 및 매립지 등의 문제로 동네가 반으로 쪼개지는 현상을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었죠”라며 “화합을 통해 동네를 바로잡기 위해 이장을 하겠다고 나서게 됐습니다”라고 초남마을 이장 직을 맡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손재기 이장과 광양시민신문의 만남은 이번이 두 번째다. 첫 번째 만남은 업체탐방 코너 취재를 위해 창덕마을 ‘용두구판장’을 방문했을 때다. 시간이 지난 지금 몸이 예전같지 않아 아쉽게
도 하던 일을 접었지만, 초남마을을 위해 여러 가지 사업들을 구상하고 추진하며,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아내 박정희 씨와 함께 초남마을 발전에만 전념하고 있다.

▲ 초남마을 전경

초남마을에 대해 물었다. 그는 “초남마을은 읍내 최고 부촌동네로 통했어요. 하지만 86년 초남
산단, 율촌산단 등이 들어서며 산업화 이후로 모든 게 바뀌었죠”라고 털어놨다.
초남마을은 광양제철소가 가동되고 철도가 놓이면서 어업을 하며 먹고살던 마을 사람들은 바
다와 단절됐다.
그렇게 바다를 내어준 채 과거의 영화를 뒤로하고, 묵묵히 주변 환경의 변화를 감내해야했다.

손재기 이장은 “초남마을은 70%의 주민 동의를 받아 현재 이주를 앞두고 있어요. 앞으로 1~2
년 정도 시간을 예상하고 있으며, 올 상반기 안에는 가닥이 잡힐 듯해요. 이뿐 아니라 이것저것 이장으로서 책임지고 해결해야 할일이 너무 많더라고요. 사실 이렇게 많은 줄 몰랐습니다”라고 웃으며 고충을 하나씩 털어놓기 시작했다.

손 이장은 “대형주차장이 생기는 것에 대해 시에서 주민들의 동의와 주민들을 위한 대책과 대
안을 이야기하는 설명회를 가져야하는 거 아닌가 싶은데, 이렇다 말이 없어요. 또 광산 쓰레기
매립장에 관련해서도 해결해나가야 하며, 굴할매바위도 없어질 위기에 놓여 현재 경제청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라며 근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 굴할매 바위

초남마을의 총 인구수 92명. 이중 53명은 65~80세 이상으로 50%가 몸이 불편하신 어르신들로 구성되어있다.
이에 손재기 이장은 지난 1월 두 팔을 걷어붙였다. 어르신들이 건강하고 살기 좋은 동네를 만들기 위해 만원에서 10만 원까지 이곳저곳에서 후원받은 돈으로 어르신들에게 무료급식을 실시한 것.

식단도 영양사 분들에게 자문을 받아 열흘단위로 다양하게 짜고 있다. 또한 여러 사람이 먹는
것이기에 위생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남은 음식은 절대 재사용 하지 않고, 청결하게 개인 식판을 사용하고 있다.

오전 11시 30분, 손재기 이장과 그의 아내 박정희 씨 그리고 노인 봉사자분들이 함께 어르신들의 점심식사를 준비한다.
식사를 마친 후엔 짬이 나면 어르신들을 모시고, 병원, 행정기관, 약국 등을 들려 편의를 돕는다.
손 이장은 “어르신들은 버스를 오르내리는 자체가 힘에 부치니 당연히 도와 드리는 게 맞죠”라며 “어르신들이 행복해 하실 때가 저에게도 제일 행복한 시간”이라고 덧붙였다.

오후 5시가 땡하고 울리면 초남마을 회관은 또다시 사람들로 북적북적 거린다. 손 이장 내외가 어르신들의 점심뿐만 아니라 저녁까지 하루 두끼를 책임지고 있기 때문이다.

저녁식사를 앞둔 어르신들에게 다가가 이장님은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 물었다. 어르신들이 “뭣을 말해줘야 된가”라고 되묻자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손재기 이장은 “어머니들, 신문사에서 왔응께 거짓말 말고 참말만 말해야해!”라고 말하며 사람 좋은 웃음을 보였다.

그러자 어르신들은 하나같이 “우리 손 이장은 자식보다 훨씬 낫어야, 봉사정신이 얼마나 뛰어
난가 노인들한테 참말로 잘해. 하하하”라며 손 이장을 치켜세웠다.
또 다른 어르신은 “우리 마을에서 제일 어려서 긍가 젊은께 일을 잘하는 거 같어. 저녁 묵으로
안오면 직접 찾아 가까꼬 밥을 꼭 챙긴당께 많이 걱정이 된갑서. 나는 계속 손 이장이 초남마을 이장이었음 쓰겄네, 다른 인재가 없당께”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손 이장이 어르신들에게 막걸리를 따라 드리며 앞으로도 초남마을의 평온과 어르신의 건강을 위한 “건배”를 외쳤다. 어르신들은 유쾌하게 “건배”를 따라 외치며 막걸리를 들이켰다.

쓰레기매립장, 산단, 분뇨처리장 등 최악의 조건 속에서도 인내하며 지켜온 초남마을, 비록 농
업과 어업이 균형을 이루던 예전의 풍요로운 모습은 되찾기 힘들겠지만, 따뜻한 온정이 넘치는 모습만큼은 어느 마을에 견주어도 단연 ‘으뜸’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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