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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 노역의 흔적 이쿠타마 공원(生玉公園)오사카 여행 속 역사의 발자취 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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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3.24  21:4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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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쓰쿠바대학교 교육학 박사과정수료 김보예

오사카 시리즈 Ⅰ·Ⅱ에 걸쳐서 덴노지 공원(天王寺公園)의 1919년의 3.19 독립운동의 정신과 932년 오사카 성(大阪城)의 윤봉길 의사의 순국에 관해 이야기했다. 오늘은 오사카의 마지막 장소로 1940년대의 강제 징역의 서러움이 묻혀 있는 이쿠타마 공원(生玉公園)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일제는 ‘중일전쟁’(1937~1939)을 시작으로 ‘태평양 전쟁’(1941~1945)에 이르기까지 전쟁의 수렁이 빠지기 시작하며,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중일전쟁의 장기화로 인해 인적, 물적 자원에 있어서 총체적 난국에 봉착한 일제는 1938년 4월 1일, 국가총동원법(国家㷓動員法)을 공포한다. 그해 5월 5일 일본 국내에 시행되었으며,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 대만, 사할린에도 의용(依用)되었다. 국가총동원법은 강제연행, 강제노동 실시에 구실을 제공했다.
누굴 위한 전쟁인지 알 수 없는 피 말리는 상황이 시작된 것이다.

저번 편(윤봉길 의사의 숨결이 숨 쉬는 오사카성)에서 ‘위소형무소’와 함께, 오사카 성내에 있는 ‘육군 제4사령부 청사(現미라이자 오사카성)’에 대해서 언급했다. 1800년대 말부터 오사카는 긴키지방(近畿地方)의 군사상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때문에 태평양전쟁 말 1944년 12월부터 1945년까지, 오사카는 미군으로부터 약 50번의 공습을 받았으며, 그중 8회는 100대 이상의 폭격기에 의한 대공습(大空襲)이었다.
2018년 8월 12일에 반영된 NHK 스페셜 「본통공습 전기록(本土空襲 全記1錄)」에 의하면, 미군이 일본을 공습한 횟수는 2000회가 넘으며 피해자는 약 46만 명에 이른다고 했다.

미군이 4년에 걸쳐서 개발한 장거리 폭격기 B-29는 일본 공습의 주력이었다. 미군은 B-29가 왕복할 수 있는 곳에 미군 기지를 세우고자, 일본과 2400km뿐이 떨어지지 않은 사이판의 마리아나 제도를 점령하기로 한다. 1944년 2월 미군은 일본과 마리아나 제도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그해 7월 사이판은 미군에게 함락되고 만다. 그리고 미군은 계획했던 일본 본토 공습을 11월에 실시한다.

▲ 이쿠타마 신사-사진 제갈대식(사진가/디자인이안 대표)

조선인 강제 연행 진상 조사단(朝鮮人強制連行真相調査団)의 『조선인 강제 연행 조사기록 오사카 편』(朝鮮人強制連行調査の記錄 大阪編, 1993)에 의하면 일본 정부는 본토공습에 대비하여 본격적으로 지하 시설을 건립에 들어 갔으며, 1944년 10월 이후부터는 「본토결전」이 정부·군부의 슬로건이 되었다고 한다.

일본에 지하벙커가 많은 것은 「본토공습」과 관련이 깊다. 그리고 지하벙커 건설에 한국인이 많이 연행되었으며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기에 강제 연행된 조선인 노동자를 추도하는 추도비가 곳곳에 세워져 있다.

오사카에 있는 지하벙커 중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곳은 오사카부 다카쓰키시 나리아이(大阪府高槻市成合)에 있는 「다치소(タチソ)」일 것이다. 「다치소(タチソ)」는 다카쓰키의 「다」, 지하(일본어로는 ‘치카’라고 함)의 「치」, 창고(일본어로 ‘소코’)의 「소」를 칭한다. 즉, 「다치소(タチソ)」는 육군의 「다카쓰키 지하 창고」의 준말이다.

그러나 오사카 주요 관광지와 떨어져 있어 선뜻 찾아가기 망설여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난바(なんば), 우메다(梅田), 신사이바시등 오사카의 주요 관광지와 편도 20분 이내에 인접해 있는 도심 속 역사를 알려드리고자 한다.

▲ 이쿠타마 신사-사진 제갈대식(사진가/디자인이안 대표)

바로 다니마치큐쵸메역에 있는 이쿠타마 공원이다.
위치는 이쿠타마 공원보다 공원 바로 옆에 있는 이쿠타마 신사(生玉神社) 검색하고 찾아 가는 것이 더 편하다. 다니마치큐쇼메역 3번 출구로 나와 직진하면 육교와 함께 이쿠타마 신사 안내표지가 보인다.

이쿠타마 신사에 도착하면 솔직히 어디가 이쿠타마 공원인지 순간 헷갈린다. 이쿠타마 공원이 이쿠타마 신사 앞에 한 개, 옆에 한 개 있기 때문이다.
지하벙커가 있는 곳은 아쿠타마 신사 옆에 붙어있는 공원이다. 농구장 철조망을 지나 공원 안으로 들어가면 계단이 보이는데, 그 계단을 내려가면 지하벙커의 입구로 추정되는 곳이 나온다. 지금은 입구를 시멘트로 막아 놓아서 지하벙커 안을 들여다볼 수는 없다.

▲ 이쿠타마 지하벙커 방향으로 내려가는 계단-사진 제갈대식(사진가/디자인이안 대표)

지하벙커 입구 앞에는 이쿠타마 공원 지하벙커(生玉公園地下壕)에 대한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안내판에는 「また、この地下壕建設にあたっては、当時の植民地支配の下で「強制連行などにより集められた朝鮮人が苛酷な労働に従事させられた。」との体験者の証言があります」(또한, 이 지하벙커를 건설하면서 당시 식민지 지배하에 ‘강제연행 등으로 끌려 온 조선인들이 가혹한 노동에 종사하였다’는 체험자의 증언이 있습니다)고 기재되어 있다.

이쿠타마 공원은 찾는 이가 없는 아주 조용한 공원이다. 안내판을 이리저리 어루만지는 나는 대로변을 지나가는 행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행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마도 ‘저 안내판이 뭐길래 붙들고 있을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그것으로 이쿠타마 공원에서의 나의 소임을 다했다고 여긴다.

우린 오랫동안 일본에 사죄를 요구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정부가 모든 것을 해결하고 그 사죄를 받아오길 바라왔다. 대한민국은 국민이 주인인 나라이지 않은가. 그 힘을 우린2017~2018년 촛불시위로 전 세계에 다시 한번 알렸다.

▲ 이쿠타마 지하벙커 방향으로 내려가는 계단2-사진 제갈대식(사진가/디자인이안 대표)

일본 여행에서 우리가 1시간만 시간을 내어, 역사가 깃든 공간에서 추도를 해 준다면, 일본인 또한 그 장소에 관해 관심을 가질 것이다. 이러한 일이 반복되면 그들도 지난 역사에 대해 뒤돌아보지 않을까?

거창한 추도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두 손을 가볍게 마음은 무겁게. 애국심 하나만 가지고 발걸음 해 준다면 충분하다.
대한민국 민초(民草)의 힘이 다시 한 번 역사에서 빛나길 바라며 오사카 칼럼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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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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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희
역사의 변곡점에 강제로 동원되어 폭력과 학살의 공포에 떨며 희생된 젊은 조선인들의 아픔과 분노의 흔적들. 일제에 의해 자행된 강제 동원의 참상을 함께 공유하고 강제 노동의 서러움이 묻혀있는 이 글이 세세히 알려지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강제 동원에 희생된 분들을 추모합니다"
(2019-03-26 03:2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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