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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 센류 작가 ‘쓰루 아키라’는 윤봉길 의사를 만났을까?-오사카 여행 속 역사의 발자취 [부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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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4.07  22: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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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쓰쿠바대학교 교육학 박사과정수료 김보예

‘쓰루 아키라(鶴彬,1909.1.1~1838.9.14)’ 생소한 이름이다. 그는 누구일까? 학자들은 그를 ‘반전(反戰) 센류(川柳) 작가’ 혹은 ‘프롤레타리아 센류인(川柳人)’이라 부른다. 센류는 5・7・5 정형율 형식의 짧은 시로, 일본 전통 시의 한 종류이다. 센류는 익살스럽게 사회를 풍자하는 것이 특색이다. 특히, 쓰루 아키라의 센류는 프롤레타리아(무산계급 또는 노동자계급)의 아픔과 분노를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血を喀いてシキをあがればくびになり/피를 토하며 갱도를 올라왔더니 해고
(산의 갱도에서 피를 토해 갱도에서 지상으로 나왔더니 그 때문에 해고당했다)

奴隷ども集めて兵器こさえさせ/노예들 모아 병기 장만
(노동자=임금노예들을 모아 병기를 제조하게 하고 그것을 갖고 전쟁터에 나간다.)

-가쓰무라 마코토 (2018) 「센류(川柳) 작가 쓰루 아키라의 반전평화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61집』 중-

가쓰무라 마코토(勝村誠) 교수는 쓰루 아키라를 ‘마지막 순간까지 정면에서 전쟁을 비판한 센류를 계속해서 토해낸 작가’로 평가하였다. 1937년 여름, 중일전쟁의 전면화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동원되자 ‘쓰루 아키라는 권력과 전쟁을 향한 비평의 칼날도 날카라워졌다’고 가쓰무라 교수는 말했다. 1937년 11월 15일 『川柳人』(센류인) 281호에 실린 그의 대표작이자 유작(遺作)에서도 그의 흔들림 없는 센류관을 느낄 수 있다.

手と足をもいだ丸太にしてかえし/손과 발을 떼어내어 통나무로 만들어 돌려보내고
(출병했던 병사가 전투에서 손발을 잃자 <국가는> 손발을 떼어낸 통나무와 같은 모습의 병사를 고향으로 돌려보낸다)

胎内の動き知るころ骨がつき/태동을 느낄 즈음 뼈가 도착하네
(출정한 병사의 아내의 태내에서 태아가 건강하게 움직이게 되었을 즈음 전사한 남편의 유골이 아내에게 도착한다)

-가쓰무라 마코토 (2018) 「센류(川柳) 작가 쓰루 아키라의 반전평화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61집』 중-

그럼, 반전 센류 작가 ‘쓰루 아키라’와 윤봉길 의사는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윤봉길 의사가 오사카성 공원 안의 육군 제4 사단사령부 직할 ‘위수형무소(衛戍刑務所)=위수감옥(衛戍監獄)’에 수감 되어 있을 때, 쓰루 아키라도 오사카 위수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윤봉길 의사는 1908년 6월생, 쓰루 아키라는 1909년 1월생,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둘의 운명은 참으로 기구했다.

1930년 1월 10일, 쓰루 아키라는 만 21세의 나이로 가나자와 제9사단 보병 7연대에 입영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쓰루 아키라가 입영한 제9사단은 상해 파견군의 본부대였다. 즉, 상해의거(윤봉길 의사가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상해 사변 기념식에 폭탄을 투척한 사건)로 사망한 시와카라 대장과 중상을 입은 우에다 육군 중장이 이끄는 부대였던 것이다. 그해 쓰루 아키라는 7월 일본 공산청년연맹 기관지 『無産青年』(무산청년)을 소지하다 적발되어(가나자와 제7연대 적화 사건), 1931년 6월 13일에 열린 군법회의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판결을 받는다. 그리고 그는 ‘가나자와’에서 ‘오사카’로 이송되어 오사카성 내 ‘위수형무소’에 1년 8개월간 수감된다.

그와 반대로, 윤봉길 의사는 1932년 11월 20일, 오사카 ‘위수형무소’에 약 1달간 수감 된 후, 12월 18일 ‘가나자와’로 이송된다. ‘가나자와’에 도착한 윤봉길 의사는 다음날(12월 19일) 미쓰코우지산(三小牛山)에 위치한 육군 제9사단의 연병장(現, 육상 자위대 미쓰코우지산 연습장)에서 오전 7시 27분에 총살당한다.

윤봉길 의사와 센류 작가 쓰루 아키라는 1931년 11월 20일부터 12월 18일까지 오사카의 ‘위수형무소’라는 공간에 28일간 머물렀다. 둘은 만난 적이 있을까?

사실 두 사람이 만났을 확률을 아주 희박하다. 윤봉길 의사의 상해 의거는 한·중·일 모두에게 자극을 준 사건이었다. 우리 민족에게는 다시 한 번 독립 의지를 고취 시켰으며, 중국인들에게는 대일항쟁의 기폭제가 된다. 일제에는 식민 통치의 불안함이 엄습해 오는 사건이었다. 때문에 윤봉길 의사는 특별 관리 대상이었으며, 다른 죄수들과의 만남이 엄격히 금지되었다. 그리고 오사카 위수형무소에 있는 동안에는 독방에 수감 되었기에, 두 사람은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윤봉길 의사와 쓰루 아키라 작가가 만났다면, 둘은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까?

“이게 누구요. 윤봉길씨가 아니오. 나 그대를 꼭 한번 만나고 싶었소.”
“….”
“내 익히 소문으로 들었소이다. 과묵하다고.”
“….”
“그대의 양심은 참으로 솔직하구려. 거짓 앞에 당당하니. 나의 양심은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아 반역자의 십자가를 등에 짊어지고 있소.”
“하하하, 성함이 어떻게 되오?”
“센류 작가 쓰루 아키라라 하오. 만나서 반갑소.”
“내 죽기 전에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아군을 만나오.”

1934년, 쓰루 아키라의 스승 이노우에 겐카보(井上剣花坊)가 세상을 하직한다. 그때 그는 긴 추도시를 스승에게 헌시하였는데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ああ、良心よ、良心よ / われわれは愛しいお前のために / 叛逆者の十字架を背負ふ / 彼も、僕も、また君たちも」(아-, 양심이여, 양심이여 / 우리는 사랑하는 그대를 위해 / 반역자의 십자가를 등에 짊어지오 / 그이도 나도 그리고 그들마저. <국문 번역 : 필자(김보예)>)

스승 이노우에를 위한 추도시는 오사카 형무소에서 출소한 후에 적혀진 시이긴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 간직되어 온 생각이 표출된 것으로 보여진다.

만약 윤봉길 의사를 만났다면, 힘없이 제국주의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전쟁의 비참함을 노래했던 센류 작가 쓰루 아키라는 윤봉길 의사에게 마지막 가는 길에 소소한 위안이 되어 주었을 것이다. 또한,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도 흐트러짐 없는 윤봉길 의사의 태도는 쓰루 아키라의 심금을 울렸을지도 모른다.

윤봉길 의사가 감금되었던 오사카 ‘위수형무소’는 오사카성 공원, 어디에 있었을까? 오사카 천수각에서 도보 5분 이내에 위치해 있는 ‘이치반 야구라’(一番櫓)가 있는 곳에 있었다.

▲ 오사카성 공원 지도 – 사진 김보예(필자)

‘이치반 야구라’에 가면 ‘위수형무소’가 있던 곳에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다.
2008년 9월 14일 쓰루 아키라 사후 70주년을 기념하며, 쓰루 아키라 현창 실행위원회(鶴彬顕彰実行委員会)에서 세운 비석(구비=句碑)이다.

비석에는 1936년 3월 15일 『蒼空』(창공) 4월호 발표한 5개의 구(句) 중 하나인 「暁を抱いて闇にいる蕾」(새벽을 머금은 어둠 속 꽃봉오리, <국문 번역 : 필자(김보예)>)가 새겨져 있다.

▲ 오사카성 쓰루 아키라 비석 - 사진 あかつき川柳会 (쓰쿠 아키라 센류회)

오사카성을 방문하게 된다면, 잠시 시간을 내어 쓰루 아키라와 함께 윤봉길 의사를 추도해 주길 바란다. 가장 어두운 순간에 빛을 품어준 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새벽이 찾아올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알림=‘오사카성 공원 성내 힐소(舊육군 위수형무소)’의 위치 정보를 정정합니다. ‘舊육군 위수형무소’의 위치와 규모에 대해서는 연구자마다 다소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사카성 천수각’에서 인정하는 舊육군 위수형무소의 위치와 범위로 정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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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희
반역자의 십자가를 등에 짊어진 솔직 담백한 양심의 소유자 "쓰루 아키라" 와 3.1운동의 숭고한 희생을 치른 윤봉길 의사.
가장 어두운 순간에 빛을 품어 준 분들 진심으로 추모합니다.

(2019-04-09 00: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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