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칼럼-가나자와 여행 속 역사의 발자취 Ⅱ

▲ 김보예 쓰쿠바대학교 교육학 박사과정수료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사내대장부가 집을 나가면 뜻을 이루기 전에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윤봉길 의사의 어록 중 가장 유명한 말이다.
1930년 3월 6일 고향을 떠나 만주로 향하기 전에 남긴 말로, 조국독립이라는 큰 뜻을 품고 이를 이루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굳센 각오가 담겨있다.
그의 염원은 살아생전 이루지 못하였고, 머나먼 이국땅에서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 암장지적비에 새겨긴 운봉길 의사 자필‘장부출가생불-사진 조현준

지난 편에서는 윤봉길 의사가 생애 마지막 밤을 지새운 가나자와성 (구)육군 위수구금소에 관해 이야기하였다. 이번 편에서는 윤봉길 의사가 마지막 숨을 거둔 장소에 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 이시카와현 전몰자 묘원 입구-사진 조현준

가나자와성에서 차로 16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이시카와현 전몰자 묘원에는 윤봉길 의사 의 순국기념비와 암장지적비(암장묘비)가 설립되어 있다. ‘전몰자 묘원’은 우리나라의 ‘현충원’과 같은 곳으로, 전쟁터에서 싸우다가 죽은 자들을 위한 공동묘지이다. 순국기념비와 암장지적비 는 도보 5분 거리에 있으니, 이동에 부담 없이 추모할 수 있다.

▲ 암장지적비와 순국기념비 이정표-사진 조현준

암장지적비는 재일 교포들과 일본 시민 단체의 성금으로 세워진 추도비로 방문자의 찬조금으로 묘비관리가 이루어지고 있다. 암장지적비에 바로 앞에는 찬조금함과 자료고가 마련되어 있는데, 자료 고안에는 ‘방문자 기록 명단서 겸추도 노트’와 ‘윤봉길 의사에 관한 자료집’이 마련되어 있다.

▲ 윤의사 암장지적비-사진 조현준
▲ 암장지적비-사진 조현준

윤봉길 의사는 암장지적비로부터 2km 정도 떨어진 미쓰코우지산(三小牛山)에 위치한 육군 제9단의 연병장(現, 육상 자위대 미쓰코우지산 연습장)에서 오전 7시 27분에 순국하셨다. 가나자와에는 별도로 사형장이 없었기에 육군 연병장 (공병 작업장)에서 총살형이 이루어졌다. 윤봉길 의사는 10m 근접거리에서 ‘업드려 쏴’ 사격 자세로 총살형을 당하였으며, 첫발이 눈썹 사이에 박혔다. 형장의 이슬이 된 그의 나이, 25세였다.

▲ 윤봉길 의사 순국 관련 사진- (사)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회업회 제공

일본군은 신문에 ‘윤봉길의 시신은 화장하였다’라고 보도하였지만, 실제로는 ‘이시카와현 전 몰자 묘원’의 소각장 옆 좁은 통행로에 암장하였다. 윤봉길 의사가 암장된 통행로는 일반인들이 도보로 다닐 수 있는 평범한 길이었다. 일본군이 거짓 보도와 함께 윤봉길 의사를 일반인들에게 오픈된 통행로에 암장한 이유에 대해 한일학자 모두 ‘윤봉길 의사의 유해를 짓밟고자 했던 일제의 잔혹한 의도가 숨어있다’고 언급한다.

윤봉길 의사가 암장되었던 ‘통행로’가 소각장 옆이었다는 사실 이외에 더 아픈 진실이 숨어있다. 바로 그 통행로는 1932년 ‘상해사변 진몰자 합장비(上海事件陣歿者合葬碑)’로 가는 길이었다. ‘진몰자’는 ‘전몰자’ ‘전사자’와 같은 의미이다. 지금은 새로이 큰 길이 만들어져 ‘상해사변 진몰자 합장비’로 갈 때 사람들이 새길로 다니지만, 당시에는 윤봉길 의사가 암장된 소각장 옆 좁은 통행로가 유일한 길이었다.

▲ 새로 정비된 길-사진 조현준
▲ 윤봉길 의사를 암장할 당시의 옛날 통행로-사진 조현준

상해사변은 중국 상해에서 일어난 항일운동으 로 중국과 일제가 무력충돌을 한 사건이다. 일제 는 중국과의 충돌에서 이겼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훙커우 공원에서 기념식을 거행했는데, 이 때 윤봉길 의사가 야채상으로 변장해 폭탄을 던졌다. 윤봉길 의사가 처형되기 이틀 전인 12월 17일, 윤봉길 의사의 폭탄으로 다리 한쪽을 잃은 제 9사단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중장은 ‘상해사변 진몰자 합장비’를 설립하고 성대한 기념식을 거행한다. 일제가 패망하기 전까지 가나자와의 초등학교 학생들은 매년 봄가을마다 ‘이시카와현 전몰자 묘원’을 청소하기 위해, 이곳을 방문했다. 아이들은 ‘상해사변 진몰자 합장비’를 비롯한 여러 ‘전물자 기념비’가 있는 묘원의 나뭇가지를 주워, 윤봉길 의사의 암장지를 지나, 소각장에 주운 나뭇가지를 불태웠다.

▲ '이시카와현 전몰자 묘원'의 전경과 청소된 나뭇가지-사진 조현준

초등학교 시절 ‘이시카와현 전몰자 묘원’ 청소 경험이 있었던 박인조님(구윤의사 암장지 보존회 초대 회장)은 윤봉길 의사의 유해가 발견되자, 윤봉길 의사를 밟고 지나다녔던 자신의 지난 세월을 참회하는 마음으로, 숨을 거둘 때까지 윤봉길 의사의 순국기념비와 암장지적비 관리에 헌신하였다. 현재는 그의 조카인 박현택님(윤의사 암장지 보존회 회장)이 그 뜻을 이어 받들고 있다. 박 인조님 묘비 또한 암장지적비로부터 도보 3분 이내에 위치에 있으니, 함께 추도해 주시면 감사하겠다.

▲ 박인조님 묘비-사진 조현준

암장지적비와는 달리 윤봉길 의사의 순국기념 비는 시야가 탁 트인 곳에 세워졌다. 윤봉길 의사 는 두 아들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맹한 투사가 되 어라’는 유촉시(遺囑詩, 죽은 뒤의 일을 부탁하는 시)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를 남겼다. 유촉시에서마저 느껴지는 조국을 향한 그의 염원을 모시고자, 순국기념비는 대한민국을 바라보고 있으며, 순국기념비에 사용된 돌 또한 대한민국의 돌로 만들어졌다. 순국기념비는 서울에서 제작하여 부산을 거쳐 일본 가나자와로 옮겨져 건립되었다.

▲ 윤봉길 의사의 순국기념비-사진 조현준

상해헌병대(상해파견군) 육군사법(陸軍司法) 청취서(聽取書)를 보면 윤봉길 의사의 ‘시(時)를 짓는 소양(素養)’에 대해 언급하는 질문이 있다. 옥중 취조에 언급될 정도로 윤봉길 의사의 문학 적 소양은 상당히 높았다. 조선이 무지(無智)한 탓에 일본의 식민지에 놓였다고 생각한 윤봉길 의사는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나기 전까지 야학과 농촌계몽에 힘쓰며 ‘월진회(月塵會)’를 창립하였다. 그가 농촌계몽 운동에 힘쏟을 당시에 ‘자유’라는 시를 지었는데, 시의 내용은 이러하다. ‘인생은 자유의 세상을 찾는다. / 사람에게는 천부의 자유가 있다. / 머리에 돌이 눌리우고 목에 쇠사슬이 걸린 사람은 자유를 잃은 사람이다’ ‘돌이 눌리우고 목에 쇠사슬이 걸린 사람’은 배움이 부족한 자를 일컫는다. 인생의 자유를 위해 떠난 당신의 여행에 늘 배움이 가득하기를 바란다.

▲ 암장지적비에 놓인 카네이션-사진 조현준

*알림
이시카와현 전몰자 묘원을 방문하실 때, 박현택님 (‘윤의사 암장지 보존회’와‘ 월진회 일본지부’ 회장)께 사전 연락(yunsaran815@gmail.com)하시면, 사료(史料) 와 함께 윤봉길 의사의 생애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습니다. 더불어 부담이 되지 않은 선에서 헌화와 함께 마음을 소소하게 담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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