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임광재

잠자리에서 일어나 시계를 보니 조금 이른 시각이다. 좀 더 잘까 말까 결정을 빨리 내리지 못하고 뒤척인다. 갈등이다. 몇 분 정도 미적거리다가 일어나 거실에 깔아 놓은 메트리스에 스트레칭을 시작한다. 이번에는 동작을 평소에 하던 횟수만큼만 할까 아니면 더 할까, 몇 회씩을 할 것인지가 갈등이다.

스트레칭을 마치고 산책을 하기 위해 마을을 지나는 7코스 둘레길을 나서면서 오늘은 컨디션
이 꿀꿀한데 정자까지만 다녀올까 아니면 마시부락 뒤 삼거리까지 다녀올까 또 갈등이다.

사실 살아간다는 것은 갈등의 연속이다. 사람이 하루를 살면서 의사결정을 내리기 위해 2백번
이상의 갈등을 겪는다든가. 사실 이런 개인적인 내적 갈등은 내 자신에게 무엇이 중요한 것이지 우선순위를 정하면 금방 풀릴 일이다.

정자를 지나 둘레길을 따라 걸어 내려가면서 길가에 즐비하게 서 있는 나무들을 바라본다. 그들은 하나같이 말없이 어제 있었던 그 자리에서 책임감 있게 분수를 지키면서 변화하는 계절의 모습을 꾸밈없이 보여줌으로써 같은 생물이지만 쓸데없는 소리만을 앞세우며 자신들의 권리만을 주장하기에 익숙한 대부분의 우리 인간들보다는 훨씬 고상하고 원만한 존재들처럼 느껴진다.

아닌 게 아니라 수목들은 생사여탈권을 가진 인간의 의지와 욕망에 따라 권리를 행사하기 보다는 의무에 충실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 최근에는 헌법상에 수권(樹權)을 인정해야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나무들 세상에도 예외가 있음을 본다.
조금 더 나아가다 누렇게 다 죽어가는 소나무가 있어 들여다보니 칡과 등나무의 횡포에 견디지 못해 숨을 헐떡이고 있다. 칡은 시계바늘이 도는 방향으로 등나무는 그 반대방향으로 꽁꽁 감아돌며 주변의 나무들을 졸라대니 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의 생태를 살피면서 옛사람들이 갈등이라는 어휘를 만들면서 무엇 때문에 칡을 뜻하는 갈
(葛)자와 등나무를 뜻하는 등(藤)자를 쓰게 되었는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래서 둘레길을 나설 때마다 톱과 전정가위를 가지고 가서 주변의 나무를 괴롭히는 칡과 등나무 줄기를 잘라 신음 중인 것들을 구하여 주고 나면 스스로가 후련해진다. 칡과 등나무의 현실적인 갈등에 나는 톱과 가위라는 수단을 통하여 숲의 갈등을 풀어준 것이다.

어린 시절 겨울을 지나 춘궁기가 오면 또래들과 어울려 산에 올라가 팔뚝만한 밥칡을 캐서 씹
어대며 시장기를 달랠 수 있어서 좋았고 초등학교 운동장 샘가 등나무 그늘 아래서 더위를 식히는 것이 좋았는데 요즈음 둘레길에서는 성가신 대상이 되다니 격세지감이다.

칡과 등나무가 숲을 온통 뒤덮고 주변 나무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꼴을 보면 영리추구를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도덕적 해이에 이골이 난 몇몇 거대재벌의 모습과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 몰상식한 짓들을 해대는 일부 정당이나 이익집단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밉상스럽게 짝이 없다.

많은 지자체 중 우리 광양시만 보더라도 숲과 둘레길 주변, 그리고 농경지를 침탈하는 칡넝쿨을 제거하기 위하여 올해에도 적지 않은 예산이 쓰여 질 것이다. 말 그대로 갈등이 가져온 사회적 비용인 것이다. 부도덕한 기업들 때문에 피해를 입은 소비자 보호를 위한 정책 관련 예산이나 국민의 세금으로 이루어진 세비와 품위유지비만을 써대고 있는 일부 알량한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치인들이 그런 얄미운 칡과 등나무와 같은 존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같은 덩굴식물이지만 담쟁이 넝쿨은 소나무와 공존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우리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현실적인 갈등을 풀어내는 방법이 없지는 않을 것이지만 이를 사회적 담론으로 이끌어내는 데는 많은 시간과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나는 아침마다 둘레길을 걸으면서 나무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들을 간단한 도구로 해
결하면서 그것들보다는 월등히 뛰어난 정신세계와 능력을 가진 인간들이 돈과 권력, 명예와 지위라는 희소가치를 차지하기 위하여 일으키는 갈등을 풀지 못하는 원인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저작권자 © 광양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